[전문기자 칼럼/윤상호]中 방공식별구역 사태가 일깨워 준 힘의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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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국제사회는 생존과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 간 권력투쟁의 장이다.’

케네스 월츠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은 일찍이 국제정치의 요체를 이렇게 갈파했다. 국제사회는 윤리나 도덕으로 강제될 수 없으므로 모든 국가는 물리력(힘)을 추구하고, 이를 대외정책의 실현수단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그 기저엔 ‘약육강식의 법칙’이 작동하는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 충돌과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냉엄한 인식이 깔려 있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의 협력이나 상생을 위한 노력과 의지를 간과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힘없는 국가와 민족은 세계사적 격변기에 제물이나 희생양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주권과 영토를 빼앗긴 채 타국의 압제에 신음하다 세계지도에서 사라진 약소국이 한둘이 아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100여 년 전 중화제국의 몰락과 일본 제국주의의 부상으로 초래된 동북아 혼돈기에 ‘대한제국’이 겪은 식민통치의 고통과 설움이 생생한 사례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외교도, 국제협력도 부질없는 일이라고 역사는 증언한다.

최근 중국 정부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힘의 외교’를 본격화하는 신호탄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이제 그만, 유소작위(有所作爲·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만 있을 뿐”이라는 중국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중국의 이번 외교도발은 영유권이나 관할권 분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험난한 파고가 ‘대한민국호’를 집어삼킬 듯 다가오는 형국이다. 점잖은 외교적 수사로 포장돼 잔잔한 듯 보이는 역내 국제정치의 수면 아래에선 격랑을 예고하는 강대강(强對强) 격돌이 이미 시작됐다.

경제적 상호 의존이 심화되면서도 군사외교 갈등이 증폭되는 ‘동북아 패러독스’는 예견된 시나리오였다. 1980년대 냉전 붕괴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매년 8%대의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군사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1989년부터 연평균 국방비를 10% 이상 늘려 신형 전투기와 핵잠수함, 항공모함 도입 등 해공군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올해 중국의 국방예산은 약 1190억 달러(약 126조3600억 원)로 미국에 이어 4년 연속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에 맞서 일본은 미일동맹의 일체화로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실력’을 키우는 ‘안보실리’를 철저히 추구해왔다. 미국과 미사일방어(MD) 체제를 서둘러 구축하고, 이지스함과 경항모급 헬기탑재호위함 등 첨단전력을 속속 배치했다. 지난해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뒤 올해 일본의 방위예산은 11년 만에 처음으로 증액됐다, 아울러 일본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평화국가’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한반도를 영향권에 둔 집단 자위권을 가진 ‘보통국가’로 직진할 태세다.

우리의 현 주소는 어떠한가. 역내 외교안보의 엄중한 현실을 돌파할 역량과 실력을 키우는 노력은 소홀히 한 채 거창한 구호만 외쳤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근 군이 도입을 결정한 공중급유기는 주변국과의 독도와 이어도 분쟁 시 공군력을 지탱하는 핵심전력이다. 하지만 이 사업은 1993년 사업 결정 뒤 예산 문제로 10여 차례나 밀렸고, 지난해까지 예산 배정과 삭감이 반복되면서 20년째 진척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국 공군은 전시와 평시 급유임무를 미군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2011년 한국 상공에서 실시한 사상 첫 공중급유훈련 때도 주일미군 소속 공중급유기의 도움을 받았다. 반면 일본은 2003년 자국 영공에서 첫 미일 공중급유훈련을 실시한 뒤 공중급유기 도입을 결정해 2010년까지 4대를 도입 배치했다. 날로 격화되는 중국과의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일본 항공자위대 조종사들은 연료 걱정 없이 독도와 센카쿠 열도 돌발사태 시 전천후 임무수행이 가능하다.

역내 패권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등거리나 균형추 외교전략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연미화중(聯美和中)을 넘어 연미연중(聯美聯中)을 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힘이 없는 외교전략은 공허한 메아리이자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지금의 역사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되묻고 있는지 모른다. “100년 전의 역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다른 역사를 만들 것인가.”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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