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헌것, 새것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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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여섯 살 때다. 아버지가 집을 지으셨다. 빨간 벽돌 외벽, 옥색 기와, 남색 철문, 하늘색 담벼락. 1980년대 초반 흔히 보던 자그마한 집이었다.

3년 뒤 도둑이 들었다.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는 곧 이사를 결정했다. 그 뒤로 죽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딱 한 번 그 집 앞을 다시 찾았다. 20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 그럭저럭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고마워서 담장 아래 쪼그려 앉아 한동안 멍하니 철문을 바라봤다.

아파트에서 느린 걸음으로 30분 거리인 옛집 골목에 들어가 보지 않은 건 겁이 나서였다. 누나 손 붙들고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오가던 건널목 양편으로 잡초 번지듯 삽시간에 뭉텅뭉텅 들어선 술집이 무서웠다. 쌀집과 닭집 나무 간판이 네온 불빛으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저녁나절 삼청동에서 통의동 쪽으로 걷다가 그 철문 생각이 났다. 휘황한 백색 조명 뒤 우뚝 선 광화문이 뽀얗게 멀끔했다. 갖은 곡절 겪어내며 불타고 부서지고 기우뚱 밀려났던 대궐문을 원래 위치에 번듯이 다시 세운 건 분명 좋은 뜻이었을 거다. 하지만 배움 부족한 탓에 휘영청 밝은 조명 곁을 서둘러 지나며 든 생각은 그저 짤막했다.

새거네.

화재 복구 공사를 마치고 야단법석 공개되기 얼마 전 택시를 타고 숭례문 앞을 지나다 알록달록 단청을 올려다보며 했던 생각, 피맛골을 싹 밀어내고 네모 반듯 올려 세운 주상복합 건물을 처음 어리둥절 건너다보며 들었던 생각, 연애에 실패할 때마다 차 몰고 혼자 달려갔던 강원도 백사장을 두부 모판처럼 마름질해 놓은 시멘트 포장 위에 서서 머금은 생각…. 똑같았다.

새거구나.

종묘와 창덕궁은 걸음마다 절로 경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공간일까. 그렇게 배웠지만 그렇다고 동감한 적은 없다. 카메라 렌즈를 거듭 들이대도록 만드는 건 건물 모양새가 아니라 틈새로 엿보이는 시선들이었다. 옛사람이 섰던 자리에 서서 그의 시선을 되짚는 즐거움의 크기는 그곳에 쌓인 시간의 두께에 비례한다. 긴 휴가를 얻은 세계 곳곳 사람들이 유럽으로 몰리는 까닭도 그것이라 생각한다.

아궁이를 치우면 세월마다 눌러뒀던 음식 맛이 날아간다. 고풍을 흉내 내 옛길 흔적 표지를 달아놓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물론 옛 맛이 반드시 나을 리는 없다. 어쨌든 분명, 다른 맛이다.

찬 바람이 불어오니 또 온 도시가 공사판이다. 큰 불편 없이 걸어 다니던 인도 블록이 해체되고 별 탈 없던 도로 포장이 벗겨진다. 헌것을 무심히 새것으로 당연한 듯 바꾼다. 왜 바꾸는지, 옛것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새것을 만든 작업의 흔적만 확 도드라진다. 옛것을 애써 지켜봤자 드러났을 리 없는 흔적이다.

어디에도 좀처럼 시간이 쌓이지 않는다. 옛집 골목은 아마, 다시 찾을 일 없을 거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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