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고기정]김정욱 선교사와 박창신 신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북한 문제에서 인권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았다고 느낀 건 두 종교인 때문이었다. 침례교 김정욱 선교사가 평양에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북한이 지난달 7일 ‘남조선 정보원 첩자’를 억류 중이라고 밝힌 지 며칠 뒤였다. 신변 안전을 염려해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은 석방 교섭에 미온적이고 북한은 김 선교사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은 채 시간만 끌었다. 이대로 가다간 사람만 더 다치겠다 싶어 기사화하기로 했다.

김 선교사를 처음 뵌 게 2011년 겨울이다. 중국 랴오닝(遼寧) 성 단둥(丹東)에서다. 지하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신도는 북한 주민들이었다. 돈을 벌 요량에 친척 방문 비자로 중국에 들어왔다가 일이 잘못돼 오갈 데 없어진 사람들, 압록강 도강에는 성공했지만 한국행은커녕 당장 굶어죽게 생긴 사람들을 먹이고 재워줬다. 북으로 돌려보낼 때는 옷가지와 음식은 물론이고 국경 초소의 군인들에게 쥐여줄 돈까지 들려 보냈다.

항상 형편이 궁했다. 김 선교사 가족 4식구는 100만 원 남짓한 생활비로 한 달을 지냈다. 한국에서 교회를 세우는 게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곳엔 이미 많은 분이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데 굳이 가서 뭐하겠느냐고 했다. “지금 영(靈)과 육(肉)이 필요한 사람들은 저 북한 주민”이라고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올해 초여름 지하 교회가 발각됐다. 공안은 교회에서 기숙하던 북한 주민들을 붙잡아 강제로 북송했다. “노동교화소로 끌려간 자매님도 있다고 합니다.” 김 선교사는 그러면서 많이 슬퍼했고, 많이 미안해했다.

그토록 원하던 국수공장을 세운 지 얼마 안 돼 이런 일이 생겨 더 가슴 아파했다. 공장이라야 기계 한 대가 고작이었지만 체계를 갖춰 북한 주민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했다. 그러나 교회가 털리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북송 주민들이 중형을 받은 건 마약과 동급으로 치는 종교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김 선교사는 북에 들어가기 전 지인들에게 “직접 가서 교인들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광신도의 무모한 행동으로 우리 정부만 골치 아프게 됐다는 뒷말이 나왔다. 하지만 김 선교사가 북한을 두고 일찌감치 ‘정치’를 했다면 이렇게 홀대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정성으로 ‘북한’자가 들어간 조직을 만들고, 간혹 김정은 반대 집회를 하며, 정부와 적당히 호흡을 맞췄다면…. 그랬다면 통일부는 그의 석방 문제를 두고 지금처럼 대응했을까.

반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박창신 신부의 대북관에는 정치가 너무 흥했다. 그는 “문제 있는 곳(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하면 북한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북한에서 쏴야죠. 그것이 연평도 포격 사건이에요”라고 말했다.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북풍(北風)은 보수 정권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박 신부는 한국 정치에 북한을 끌어들였다. 우리는 또다시 어느 누구의 구체적인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종북(從北) 논란’에 빠져들었다.

김 선교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국수를 줬지만, 북한은 그를 국가정보원 간첩으로 둔갑시켰고, 박 신부는 이런 북한에 대해 영토주권을 인정해줘야 하는 정상국가라고 두둔했다. 김 선교사는 잊혀지려 하고 있지만 박 신부는 좌우 양쪽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이번 주말이면 그가 북에 간 지 두 달이 된다. 억류 기간이 더 길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