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전승훈]메르켈, 자장가 불러주는 지도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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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파리 특파원
전승훈 파리 특파원
니콜라 사르코지부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까지. 2010년 유로존 위기 이후 유럽연합(EU) 주요국 수반 중 선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후임자들도 고초를 겪고 있긴 마찬가지다. 예외는 단 한 명,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그는 22일 압도적인 승리로 3선 연임에 성공했다.

독일인들은 지난 8년간 금융위기, 유로존 부채위기 속에서도 독일이 홀로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메르켈 총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인들은 메르켈 총리를 ‘무티(엄마)’란 별명으로 부른다. “엄마가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구호와 함께 메르켈이 하트 모양으로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사진은 기독민주당(CDU) 총선 포스터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독일 사람들은 조용한 걸 좋아한다. 집을 구할 때도 차량 소음이 들리지 않는 집을 선호한다. 정원을 함께 쓰는 다세대 주택에서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면 창문 밖에서 “조용히 해 달라”는 말이 곧바로 날아든다고 한다.

메르켈의 ‘엄마 리더십’이 독일인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조용함 때문이었다. 그는 개혁과 변화를 내세우며 목청만 드높이고, 실험을 하다 나라를 망치는 마초 정치인들과 달랐다. 대신 오랜 기다림과 타협을 통해 차근차근 안정된 권력을 다져나갔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메르켈의 메시지는 세상이 시끄러워도 독일은 평상심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그는 2005년 중도좌파인 사민당과 대연정, 2009년 친(親)기업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보수연정을 하며 좌우를 오가며 타협하면서도 유로화 세금 노동 정책의 큰 줄기는 바꾸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잘난 체하거나, 귀찮게 괴롭히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일을 성사시키는 메르켈에게 신뢰를 보냈다.

메르켈은 ‘조용함’을 위해 야당의 정책까지 미리 받아들여 아예 논쟁의 싹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녹색당의 원전폐기 공약, 사민당의 복지정책 등을 대폭 수용한 지난 총선에선 논쟁이 사라져 지루할 정도였다. 페어 슈타인브뤼크 사민당 총리후보는 “메르켈이 유권자들에게 자장가만 불러주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독일인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자장가였다. 시끄러운 세상의 복잡한 일은 엄마에게 맡기고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메르켈의 자장가는 중국 고대 요(堯)나라 태평시대에 백성들이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에 비견할 만하다. 국민들이 정치의 필요성조차 못 느끼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정치다.

3선에 오른 메르켈은 독일을 넘어 ‘유럽의 엄마’ 역할까지 부여받았다. 그러나 부채위기를 겪는 남유럽 국가에서는 혹독한 긴축정책과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메르켈을 심술궂은 계모로 생각한다. 메르켈은 굶고 있는 남의 집 자식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갖가지 요구를 붙였다. 커서 돈 벌면 꼭 갚으라고 단단히 일러두면서, 집안 청소도 시키고, 시험문제를 내주고 밤새워 공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메르켈의 이런 요구가 남유럽 국가에는 전례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경제 체질이 개선돼 유로존의 회복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면 메르켈은 역사적인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조용한 리더십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국내 정치권의 소음지수는 세계 여느 나라에 비해 높다. 갈등이 폭발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기 전에 미리미리 타협하고 포용하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우리를 위해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소리 없이 집안을 이끄는 엄마 같은 존재 말이다.

전승훈 파리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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