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21세기 리벳공 로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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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2002년 5월 소더비 경매에서 포스터 작품이 500만 달러에 팔렸다. 미국의 한 잡지 1943년 5월호 표지에 실렸던 작품이다.

휴식을 취하는 포즈로 한 여성 노동자가 앉아있다. 소매를 걷어붙인 오른팔의 근육이 웬만한 남성보다 강인해 보인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리베터란 작업 장비가 놓여 있다. 공기 압축을 이용해 리벳이란 큰 못을 박는 장비다. 얼핏 허리춤에서 이름표가 보인다. 로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다. 성조기가 배경 전체를 채웠다. 미국의 국민 화가로 알려진 노먼 로크웰이 그렸다.

리벳공 로지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하워드 밀러가 만든 것이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육체미 선수처럼 이두박근을 부각시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상단에는 ‘We Can Do It!’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밀러의 로지 캐릭터는 우표, 머그컵, 도시락 통, 티셔츠 등에 단골로 등장했다. 여성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도 종종 활용됐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캐릭터를 부착한 팬시용품이 팔리고 있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아이콘인 로지. 실제로는 미국 정부가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권장하기 위한 캠페인의 산물이었다.

로지가 등장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고립주의를 기본 외교 노선으로 삼고 있던 미국은 참전을 망설였다. 만약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무기 장사나 하면서 이익을 챙겼을지도 모른다.

진주만 폭격의 피해는 컸다. 분노한 미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로 떠났다. 공장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해졌다. 미국 정부는 집 안에 있는 여성들을 일터로 끌어내려 했다. 남성 노동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리베터를 여성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도할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로지다.

여성의 참정권이 미국에서 허용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남성보다 정치적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에게 왜 참정권을 주느냐는 볼멘소리도 많았다. 그 후로도 가정을 지키는 게 여성의 본분이란 고정관념은 잘 깨지지 않았다.

이런 잡음들은 로지의 등장으로 모두 사라졌다. 수백만 명의 여성이 군수 공장과 중공업 공장에서 억센 노동을 잘 해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전쟁이 끝나 복귀한 남성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여성이 늘어났다. 로지는 다시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탄생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3선 연임을 확정지었다. 임기를 무사히 끝내면 유럽의 최장수 총리가 된다고 한다.

이런 정치 현상을 두고 여성이 남성을 능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남성이 약자로 전락했다며 농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치지도자의 성별이 남녀평등의 척도는 될 수 없다. 일을 하고 싶어도 가정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다. 아이들 교육 문제는 엄마들의 천형(天刑)이 돼 버렸다. 기업, 학계, 관계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여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21세기인 지금도 리벳공 로지의 투쟁은 진행형인 셈이다.

대한민국의 그녀들에게도 리벳공 로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혹시 좌절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시라. 마음 한편에 로지를 방치해 놓고 있는 건 아닌지.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리벳공 로지#하워드 밀러#여성 인권 운동#앙겔라 메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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