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0년 되는 해 남편에게 신장이식, 이재현 회장 부인 김희재 씨 감동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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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9월 24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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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망설임 없는 결정, 아버지에게 신장 떼어주겠다고 나선 아이들도 대견하더군요”


▲1 외손자와 함께한 김희재 씨. 2 이재현 회장은 아내에게 신장이식을 받은 후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1 외손자와 함께한 김희재 씨. 2 이재현 회장은 아내에게 신장이식을 받은 후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천생연분이란 바로 이 부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CJ 이재현 회장이 지난 8월 말 서울대병원에서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신장 공여자는 다름 아닌 부인 김희재 씨. 수술은 성공리에 마쳤으며 현재 이 회장 부부는 병원에서 회복 중이다.

<<8월 28일 이재현(53) CJ그룹 회장과 부인 김희재(53) 씨가 나란히 병원 수술대에 올랐다. 신부전증으로 고통받는 이 회장에게 아내가 직접 신장이식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회장은 신부전증 말기로, 신장 기능이 정상인의 10%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으며 그 밖에도 유전 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CMT)·고지혈증·고혈압 등을 복합적으로 앓고 있어 건강이 최악인 상태였다. 법원에서도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 회장이 신장이식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 3개월간 구속집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던 것. >>
가족에게 신장이식 받는 것 부담스러워 수술 미룬 이재현 회장
이날 5시간의 긴 수술 끝에 김 씨의 왼쪽 신장이 이 회장의 오른쪽 복부에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현재 두 사람은 병원에서 회복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부부는 1984년 결혼, 슬하에 딸 경후(28) 씨와 아들 선호(23) 씨를 두고 있다. 결혼 30년 되는 해, 남편에게 그 무엇보다 뜻 깊은 선물을 한 김희재 씨로부터 신장이식 비하인드 스토리와 심경을 들었다. 건강이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탓에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다.
▼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회복 기간도 오래 걸리고, 특히 이식받은 사람에게 감염이나 거부 반응 등의 우려가 있다고 하던데 두 분 건강은 어떤가요.

“수술은 전체적으로 잘됐습니다. 저는 원래 건강 체질이라 그런지 2주가 지나자 거의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아빠(김 씨는 이재현 회장을 이렇게 불렀다)도 수술에서 문제점은 없었지만 신장을 이식받은 후 약이나 면역 억제제 부작용, 각종 감염의 위험 등 조심할 게 굉장히 많더군요. 지금도 계속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부부라도 장기 기증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인 만큼 선뜻 결심하기 어려운데요. 어떤 마음으로 기증을 결심했습니까.

“아내, 엄마라면 누구나 저와 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남자, 남편과 아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어요. 신장이식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1년 전이었습니다. 아빠는 그전부터 신장이 계속 나빠지고 있어서 식이요법을 해왔는데, 의사 선생님이 지난해 8월 이식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당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처가 4촌까지 가족 가운데 기증자가 나오지 않으면 국립장기이식센터에 대기 등록을 하고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평균 대기 기간이 5년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5년 동안 기다리며 투석을 하다 보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몸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특히 아빠의 경우엔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있어 투석 치료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저와 아들, 딸 이렇게 셋이 모여서 의논을 했어요. 아이들은 아빠가 신장이식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셋 중 누구든 검사 결과가 가장 적합하다고 나오는 사람이 수술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 검사 결과는 어땠나요.

“선호가 가장 적합했고, 저는 두 번째로 나왔어요. 저도 아빠랑 같은 A형이지만, 선호는 자식이니 혈액형뿐만 아니라 유전자가 상당 부분 일치했겠죠. 의사 선생님은 2013년 상반기 중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셋이 모여서 의논할 때도 그랬고, 당시에는 받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결과가 될 수 있도록 선택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선호가 신장을 떼어주기로 했어요. 4월에 꼭 수술을 받기로 하고 다른 가족들과 어른들께도 알렸습니다. 하지만 4월이 돼서도 아빠는 수술을 차일피일 미뤘어요.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신장을 받는다는 점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수술은 미뤄졌고 식이요법을 열심히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며 버티고 있었죠. 사실 저는 그때 이미 제 신장을 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부부끼리 기증하는 사례도 꽤 있다고 하고, 저는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체구도 여자치고는 작은 편이 아니거든요. 제가 신장을 제공하는 것을 알면 아빠나 선호 모두 싫어할 것 같아서 공여자가 누군지 모르게 수술하는 방법을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5월 21일 검찰 수사가 시작됐죠.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까지 되면서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수술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어요. 제가 신장 기증에 앞서 CT 혈관 검사 및 추가 검사를 받으면서 아빠가 자연스레 공여자가 저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빠 입장에서는 선호나 저나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래서 제가 ‘같은 신장으로 여생을 함께 조심하며 살자’고 졸랐어요.”

▼ 신장 공여자가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 회장의 심경도 복잡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해 가족의 신장을 받는다는 것을 매우 속상해했어요. 수술 이후에는 자꾸 ‘미안하다’ ‘고맙다’고 해요. 그러면 저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내 신장이 다른 사람 몸에 가서 일한다는 게 신기하다’ ‘요즘 의학이 대단하다’며 신기하다는 투로 말을 돌리곤 합니다.”

▼ 혹시 잘못될 경우에 대한 염려는 없었는지, 또 수술 후 마취에서 깼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아빠가 빨리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 신장이식 후에는 음식과 주변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남편을 챙기는 게 버겁지 않나요.

“저는 선천적으로 건강한 편이에요. 나이에 비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빠는 최근 들어 부쩍 다리 근육이 많이 약해져서 걱정입니다. CMT라는 병은 뭔가를 치료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서 걱정이 많아요.”

▼ 이번 일을 계기로 가족 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신장을 이식하게 됐지만, 처음 의논할 때 아이들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 자신의 신장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어요. 저희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의 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것은 회복 과정에서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 가족이나 이런 일이 생기면 아주 힘들 거예요. 신장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한 해 1만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가족 간 기증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는군요. 저희는 운이 좋은 편이죠.”
결혼 후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살림, 고생이라기보다 어른들 사랑받을 수 있어 감사
이재현 회장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다. 아버지는 ‘비운의 황태자’로 알려진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김희재 씨는 재벌가 안주인 가운데서도 조용한 그림자 내조를 펼쳐온 것으로 유명하다. 신장이식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언론 노출이나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김 씨는 이화여대 미대 출신으로, 결혼 후에는 맏며느리로 서울 장충동 본가에서 시할머니 고 박두을 여사, 시어머니 손복남 여사를 모시고 살았다. 신혼 초 시할머니가 분가를 하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김 씨가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딸 경후 씨와 아들 선호 씨는 둘다 미국 컬럼비아대 출신이다. 경후 씨는 불문학, 선호 씨는 금융경제학 전공. 자녀들은 바닥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2008년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경후 씨는 2011년 대리로 경력 입사했고, 아들 선호 씨는 올해 상반기 대졸 공채를 통해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다.

▼ 두 분은 처음 어떻게 만났고, 어떤 점에 이끌려서 결혼하게 됐나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만났어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아빠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이는 연말 모임이었죠. 당시 유행은 청바지에 모자 쓰고 그럴 때인데 아빠는 옷을 점잖게 빼입고 있어서 ‘아저씨’ 같았죠. 그날 이후로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이 여러 차례 함께 어울렸어요.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단둘이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아, 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에 다닐 때 씨티은행 신입 사원으로 일하고 있던 아빠와 우연히 연락이 닿았어요. 너무 오랜만이라 서로 정말 반가웠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날이 첫 데이트예요. 그날부터 딱 1년간 매일 데이트를 하는데 아빠가 자동차(포니2)를 몰고 집까지 바래다줬어요. 당시 저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곧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거다’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가지 마라’라고 하더군요. 그게 프러포즈였어요. 우습지만, 그렇게 결혼하기로 했답니다.”

▼ 신혼 초부터 본가에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시월드’를 자처한 건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요.

▲1 이재현 회장과 아들 선호, 딸 경후 양의 어린 시절 모습. 2 선호 군 돌 무렵에 찍은 
사진. 두 자녀는 아버지에게 서로 자신의 신장을 내주겠다고 했다고.
1 이재현 회장과 아들 선호, 딸 경후 양의 어린 시절 모습. 2 선호 군 돌 무렵에 찍은 사진. 두 자녀는 아버지에게 서로 자신의 신장을 내주겠다고 했다고.
“아빠가 워낙 효자예요. 모시고 살 때도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고 출근하곤 했죠. 대가족이었죠. 기본 8명 이상이 매일 점심, 저녁을 같이했어요. 아빠는 당시 대한민국 월급쟁이들이 다 그렇듯이 매일 밤 12시에나 들어왔어요. 힘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죠. 하지만 시어머님께서 아주 잘해주셔서 어려움이 덜했던 것 같아요. 당신께서는 옛날부터 할아버님, 할머님을 모시면서 어려움이 많으셨을 텐데 저에게는 정반대로 시집살이를 전혀 시키지 않으신 거예요. 한마디로 제가 아이처럼 살 수 있게 해주셨죠. 당시 제가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오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잘 이해해주시고 배려해주신 게 지금도 정말 감사해요.”

▼ 어른들과 함께 살면서 배운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시할머니나 시어머니의 가르침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기억에 남는 일은 있어요. 할머님이 선호를 정말 예뻐하셨죠. 할머님께서 2000년 96세로 돌아가시기 전 10년 동안 심장이 안 좋으셔서 고생을 하셨는데 그때 잘 견디신 것이 선호 덕분이라고 모두들 말씀하실 정도예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유학 가겠다고 결심하고 말씀드렸는데 할머님 첫마디가 ‘나 죽기 전에는 못 보낸다’였어요. 선호를 곁에 두고 싶으셨던 거죠. 그러던 할머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선호가 문병을 갔는데 ‘선호야, 할머니 이제 안 되겠다. 니 미국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운명을 예감하신 모양이에요. 선호의 미래를 생각해서 가라고 하신 할머님의 마음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 다른 대기업 안주인들보다 조용한 삶, 조용한 내조를 펼치는 걸로 유명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오히려 특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저 스스로 ‘남들과 다르다’는 특권 의식이나 그런 것이 없어요. 엄마로서 아내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 남편과 아버지로서 이재현 회장은 어떤 편인가요. 점수를 준다면 몇 점 정도인가요.

▲신혼 초 이재현 회장 부부. 김희재 씨는 남편과 아버지로서 이재현 회장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신혼 초 이재현 회장 부부. 김희재 씨는 남편과 아버지로서 이재현 회장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연애할 때 1년 동안 매일 집에 데려다줬으니 정말 자상하지요. 지금보다는 교통량이 적었어도 멀리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것이 힘들었을 거예요. 아빠로서는 살갑고 친구처럼 다정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아껴줘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일 때문에 바빠서 함께 시간을 많이 못 보내주는 만큼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고요.”

▼ 자녀들을 키울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저는 아이들이 ‘내가 누구다’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평범하게 자라길 원했어요. 또 선호를 낳고 나서도 4대가 5년 이상 함께 살았는데 어른들이 많은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른들 계신 자리에서도 아이들의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고 꼭 아이에게 반응을 해줬어요.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잘했다 싶은 건 질문할 때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차근차근 대답을 잘해준 것입니다.”

▼ 자녀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던 순간이 있을 텐데,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나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기대 이상으로 굉장히 잘해줬어요. 둘 다 타고난 성격이 정말 좋아요. 키우면서 서로 큰 소리나 볼멘소리 한번 내본 적이 없어요. 딸아이 혼내본 것이 서너 살 무렵 고집부릴 때밖에 없었을 정도예요. 둘 다 무난히 학교 잘 다니고 어른들이 원하는 만큼 공부도 잘해줬어요. 제가 별로 해준 건 없는데 스스로 알아서 잘했으니 그게 자랑스럽습니다.”

▼ 자녀들이 모두 CJ그룹에서 바닥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녀가 회사 일을 시작할 때 당부한 점이 있다면.

“아빠 역시 씨티은행에 다니다가 당시 제일제당 경리부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원, 대리, 과장 등의 직급을 모두 거쳤어요. 그런 경험이 있어야 훌륭한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장의 딸, 아들이라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다른 동료 직원들과 동등한 존재로 격의 없는 소통을 하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유학 중이던 두 아이가 귀국할 때마다 아빠와 함께 온 가족이 봉사 활동을 다녔어요. 주로 독거노인이나 장애인 요양 시설을 찾아가서 김장을 하기도 하고 급식을 나눠주는 일도 했어요. 회사 일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고민하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 경후 씨는 결혼을 했고 선호 씨도 곧 배우자를 만나야 할 텐데, 사위나 며느리에게 바라는 점이 있을 것 같아요.

“특별히 바라는 점은 없어요. 서로 잘 어울리고 편한 사람이면 됩니다. 경후가 2008년 시집을 갈 때 그랬어요. 당시 컬럼비아대 4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사귀고 있을 때 미국에 가서 만나봤어요. 처음 만났는데도 낯설지 않고 무척이나 편했어요. 아빠도 처음에는 ‘우리 딸 데려가는 놈이 누군가’ 싶어 일부러 흠잡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죠.”

▼ 최근 CJ그룹 안팎으로 복잡한 일이 많았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듯한데요.

“이번에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아빠가 임직원과 직원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어요. ‘내 잘못이고 임직원은 잘못이 없다. 내 과오로 임직원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요. 편지를 쓰면서 아빠도 저도 울었어요. 하지만 아빠가 회사와 임직원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생각하면서 잘 이겨내리라 믿고, 저는 아빠의 건강과 가족들에게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이재현 회장은 현재 구속집행정지 기간이라 몇 달 후엔 다시 수감 생활을 해야 하는데, 건강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아내로서 걱정이 클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건강을 빨리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라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김명희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여성동아 2013년 10월호 598호 (p360~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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