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방상표, 브로커의 덫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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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상표 선점해 소송 걸거나 되팔아
24명이 6년간 1만744건 출원 ‘얌체짓’… 특허청, 블랙리스트 만들어 집중 단속

2009년부터 미국 문구브랜드 P사와 R사의 앨범, 공예장식물, 잉크 등을 들여와 인터넷쇼핑몰에서 판매하던 이모 씨는 올 4월 국내 문구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씨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이 씨가 P사와 R사의 국내 상표권을 침해했다는 것. 김 씨는 이 씨가 관련 물품을 수입한 지 2년이 지난 2011년 6월에 P사와 R사의 상표를 임의로 국내 상표로 출원해 상표권 등록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 씨는 “이미 해외 문구업계에서 유명한 브랜드를 국내 상표로 등록한 뒤 이득을 얻으려는 편법”이라며 “경찰서에 불려가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생업에 큰 지장이 있다”고 말했다.

특허청이 김 씨와 같이 국내외 유명 상표나 프로그램, 아이돌그룹 명칭을 모방·변형해 상표권을 미리 얻는 ‘상표브로커’에 대한 집중 단속에 나섰다. 이들의 행위가 불법은 아니지만 상표를 실제로 사용할 목적이 없으면서 유명 상표를 선점한 뒤 소송을 내거나 비싼 값에 팔아 상거래 질서를 해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앞서 방송인 이경규 씨가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만든 ‘꼬꼬면’이나 항공사인 ‘이스타항공’에 대해서도 상표브로커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해당 상표권을 먼저 출원해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특허청은 23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 김한표 의원(새누리당)에게 제출한 ‘상표브로커 근절방안’에서 “상표브로커로 의심되는 24명의 블랙리스트를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 상표브로커 24명이 출원(신청)한 상표권은 모두 1만744개로 1인당 447.6개에 이른다. 이들이 출원한 상표권은 ‘Twitter’ ‘카카오톡’ ‘구글’ 등 유명 메신저나 인터넷사이트, ‘동방신기’ ‘2NE1’ ‘소녀시대’ 등 아이돌그룹 이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모 씨가 최근 5년간 가장 많은 수인 4750개의 상표권을 출원했고, 김모 씨는 2529건으로 뒤를 이었다.

이들은 한 업종에 등록된 상표권이 다른 업종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다수의 상표권을 출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자동차 브랜드인 ‘아반떼’를 식당업이나 화장품, 문구류 브랜드로 바꿔 상표를 선점하는 방식이다. 이후 같은 이름을 쓰는 식당이나 화장품업체 등에 경고장을 보내 합의금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기도 한다. 상표권 침해로 인한 고소 건수는 2010년 654건에서 지난해 547건으로 다소 줄었지만, 올해 들어 8월까지 447건으로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특허청은 상표브로커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낸 민·형사소송 등에 대한 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이들이 출원한 상표를 실제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직권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또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출원한 상표는 국내외 유사상표가 있는지, 이미 알려진 상표를 모방·차용했는지 엄격히 따진 뒤 문제가 있으면 등록을 거절키로 했다. 김 의원은 “출원한 상표를 실제 사용하지 않을 경우 민·형사상 처벌이나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없도록 하고, 이미 등록된 상표라도 다른 상표를 모방·차용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 등록을 취소할 수 있도록 법령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모방상표#상표브로커#특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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