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형준]한일 갈등 최대 피해자 ‘재일 교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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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일본에서 식품을 판매하는 A 과장(40)은 요즘 울화가 치민다. 지난해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후 반 토막 난 매출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서울 본사에 “일본인들이 단단히 삐쳤다. 한국 음식을 집어들려 하지 않는다. 한국상품전을 취소하는 유통업체도 속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본사는 “독도 사태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핑계냐”고 쏘아붙였다.

일본에 네 번째 파견돼 근무 중인 금융인 B 씨(50)는 최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독도 사태 이후 도쿄(東京)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의 한국 식당 손님이 대거 줄면서 은행 빚을 갚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한국인 가게 주인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깐깐하게 심사하고 대출을 줄인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B 씨는 “지금처럼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재일교포의 인권을 높이는 일이라면 뭐든 앞장섰던 재일교포 C 씨(65)는 요즘 침묵 중이다. 이시카와(石川) 현 가나자와(金澤) 시에 사는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공무원 임용 시험에 국적조항을 둬 재일교포가 응시할 수도 없는 점에 항의하며 가나자와 시에 소송을 제기했던 사람이다. 가나자와에 사는 2000여 명의 재일교포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칫 ‘인권’ ‘차별’이라는 말을 꺼내다가 우익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C 씨는 “한일 관계 악화의 최대 피해자는 재일 한국 교민”이라고 토로했다.

오사카(大阪)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일본인 D 사장(54)은 중국에 있는 공장을 한국으로 옮길지 말지 고민 중이다. 그는 지난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갈등 때 중국인의 과격시위를 보고선 공장의 한국 이전을 적극 검토했지만 한일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재검토에 들어갔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여러 일본 기업인이 현재 한국 투자를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4명의 사례는 지난해 하반기 한일 관계가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이 역사적 잘못을 직시하길 바라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지 기반인 보수층을 껴안기 위해 침략의 과거사를 외면하는 것을 넘어 분식(粉飾) 미화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한일 관계가 개선될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일 관계 개선이 장기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면, 특히 한일 관계 악화로 고통 받는 재일 한국 교민을 위한다면 좀더 전략적이고 지혜로운 대일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발표 시점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 있다.

수입금지 발표일인 6일은 2020년 여름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상당수 일본인은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올림픽 유치에 재를 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6일 발표했다고 오해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했으면 비난의 화살이 한국에도 쏟아질 뻔했다.

기획재정부는 주요 금융정책을 발표할 때 시장에 주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금요일 오후나 토요일에 발표한다. 설령 상대 나라가 국제기준을 지키지 않더라도, 역사 갈등을 일으켜 여전히 미운 짓을 하더라도, 상대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내용의 발표는 날짜라도 조정해주는 ‘작은 배려’가 양국의 관계 개선을 가져오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특히 A 과장이나 B 씨 같은 ‘재일 민초(民草) 교민’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한일갈등#재일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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