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Harmony]평생모은 우표, 세계여행과 바꿀 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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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우취인’ 이영철 NH농협은행 신용산지점장

이영철 NH농협은행 신용산지점장은 소문난 우표 수집인이다. 13세에 처음 접한 우표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3만 장 넘게 전 세계 우표를 모았다. 그는 “우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역사책이다. 우표 수집을 하면서 각국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면 한 장의 우표에 담긴 역사성, 미적인 아름다움이 더 잘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이영철 NH농협은행 신용산지점장은 소문난 우표 수집인이다. 13세에 처음 접한 우표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3만 장 넘게 전 세계 우표를 모았다. 그는 “우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역사책이다. 우표 수집을 하면서 각국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면 한 장의 우표에 담긴 역사성, 미적인 아름다움이 더 잘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68년, 13세 소년 이영철은 친구 집으로 배달된 편지 한 통을 우연히 보게 됐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이 베트남에서 고향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소년의 마음을 한순간에 빼앗아 간 건 봉투 위에 붙은 우표 한 장. 집에 돌아와서도 베트남 전통 삿갓인 ‘농라’를 쓴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 우표가 눈에 아른거렸다. 소년은 친구에게 조르고 졸라 기어이 편지 봉투를 받아 냈다. 전쟁터에서 외로웠던 참전용사는 집으로 자주 편지를 보냈다. 동네에 우편배달원이 올 때마다 소년은 친구 집으로 뛰어갔다. 편지 봉투에 붙은 우표를 조심스럽게 떼어 내 한 장씩 모으는 것이 소년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소문난 우취인, 이영철 NH농협은행 신용산지점장(58)이 평생 애정을 바쳐 온 우표와 처음 만난 순간이다. 우취(郵趣·philately)는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를 줄인 말. 우표 수집가 중에는 스스로를 우취인이라 부르는 이가 많다. 단순히 우표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우표에 담긴 문화나 역사를 탐구한다는 자긍심이 담겨 있다.

타고난 수집광

이 지점장이 처음 모은 건 우표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신기하거나 예쁜 물건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에는 구슬과 딱지를 열심히 모았다. “구슬을 불에 비쳐 속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 속에 영롱한 무지갯빛 모양들이 휘몰아치는 게 어린아이 눈에도 아름다웠나 봐요. 손재주가 있어서 딱지치기든 구슬치기든 동네 애들 것을 제가 거의 다 땄죠.”

어느 순간 만화에 눈길이 갔다. 처음에는 용돈을 모아서 만화책을 샀다. 용돈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어머니한테 공책 산다는 거짓말로 돈을 타서 모으다가 들켜 혼나기도 했다.

구슬, 딱지, 만화를 거쳐 그가 평생 애착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우표다. 그의 학창시절에는 전 세계적으로 우표 수집 열기가 대단했다. 1970, 80년대 새로운 우표가 나온 날 아침이면 우체국 앞에 긴 줄을 서는 풍경이 흔했다. 그도 그런 우표 수집가 중 한 명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공부하느라 잠시 쉬었다. 농협에 들어간 후부터 우표 수집에 열중했다. 당시 충북 제천 지점에 근무했던 그는 월급을 받으면 주말에 서울로 올라와 화신백화점 우표상에게 달려갔다. 최소 생활비만을 남기고 몽땅 우표를 사는 데 썼다. 15년가량 수집하자 한국에서 발행한 우표는 대부분 손에 넣었다. 목표를 이루고 난 후 한동안 수집을 그만뒀다. 그 즈음 은행 일도 바빠졌고 아내 눈치도 보였다.

2002년, 그의 수집 욕구가 다시 꿈틀댔다. 이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초로 발행한 우표 수집에 도전하는 것. 한국 우표 수집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이 들어가는 일이어서 고민했지만 지금 아니면 못 할 것 같았다. 평범한 월급쟁이면서 한 가족의 가장인 그가 적지 않은 돈이 드는 세계 우표 수집을 하려면 원칙을 세워야 했다. 그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 각 나라의 1∼6번(최초부터 여섯 번째 발행) 우표까지 수집하되, 1000만 원을 넘는 고액 우표밖에 없다면 그 다음 발행 우표로 건너뛴다. 둘째, 한 달 지출액이 100만 원을 넘지 않게 한다.

150년 이상 된 클래식 우표를 수집하려면 위조우표에 대한 지식이 필수였다. 그는 본격적인 수집에 앞서 해당 우표부터 공부했다. 국내에는 자료가 없어 영문 자료를 참고해야 했다.

“제가 영어가 짧아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구글번역기를 활용해 일일이 단어를 끼워 맞춰 가면서 독학을 했죠. 공부한 걸 잊지 않도록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털사이트에 ‘세계 최초 우표 여행’이라는 카페도 만들었어요.”

“우표 속엔 세계역사가 듬뿍 담겨있어요”

전 세계의 최초 우표 수집이라는 목표를 세운 2002년부터 최근까지 그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클래식 우표 거래는 주로 이베이나 옥션 같은 해외사이트에서 경매로 진행된다. 한국과 12시간 시차가 나는 경우도 많아 응찰하려면 오전 6시부터 나서야 했다. 꼭 사고 싶은 우표가 나온 날은 계속 ‘비딩’을 따라가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우표가 3만 장을 넘는다. 이 중 150년 이상 된 클래식 우표가 5000여 장이다. 1840년에 영국에서 발행된 세계 최초 우표, 브라질 최초 우표인 ‘불스 아이’, 희망봉 삼각형 우표, 오스트리아제국(현재 유럽 10여 개 국가) 만월 소인 600여 점이 그가 유독 아끼는 것들이다. 만월 소인은 보름달 모양의 소인이 찍혔다는 뜻. 소인 모양에 따라 우표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우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역사책

그는 전 세계의 클래식 우표 수집에 열정을 쏟은 지난 10년간의 시간과 노력,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그가 꼽은 우표 수집의 가장 큰 매력은 역사 공부와 세계 여행이다.

그의 집무실 한쪽 벽에는 우표와 관련된 각종 서적들이 잔뜩 꽂혀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자주 찾는 건 고등학교 시절 보던 지리부도. 우표 수집을 하면서 매일 끼고 산 게 바로 지리부도다. 우표 수집 국가의 지명과 위치, 이 나라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자세히 메모해놓은 흔적이 책 곳곳에 남아있다.

“유럽 각국의 우표를 모으다 보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인터넷이나 서적을 통해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곳에 얽힌 소소한 역사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우표를 들여다보면 마치 그 도시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가끔은 저 멀리 유럽의 조그만 마을, 향기로운 포도밭 언덕배기에 가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그는 오스트리아 우표를 수집하다 보면 함스부르크 가문을 공부하게 되고, 중세 말 혈연으로 얽힌 유럽 각국의 왕가들과 전쟁을 알게 된다고 했다. 왜 조그만 세르비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는지,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이 왜 신성로마제국이 되었는지도 우표 공부를 통해 알았다.

“유럽 우표를 모으면서 공부하다 보니 더 오래된 문명 발상지들을 탐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왜 유럽이 아닌 척박한 아프리카에서 현생 인류가 최초로 탄생했는지도 알게 됐어요. 왜? 왜? 이런 궁금증이야말로 인류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 아닌가요.”

그는 이런 측면에서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표 수집이 좋은 교육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우표에서 배운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우표에는 그 시대의 인물, 사회상, 역사 등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많은 우표 수집가들이 우표의 매력을 ‘역사를 담은 예술’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표를 제대로 수집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저만 해도 우표 수집 때문에 영어는 물론 독어, 프랑스어, 각 국 역사, 지리까지 공부했죠. 아는 만큼 보인다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탐구하다 보면 한 장의 우표에 담긴 역사와 예술적 아름다움이 더 잘 느껴져요.”

아내와 함께하는 세계여행 꿈꿔

지난 10여 년간 그가 우표를 사느라 쏟아부은 돈은 1억5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아내의 반대가 심했겠다고 묻자 “물론 엄청나게 심했고, 아내는 지금도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가 아내를 설득한 방법은 은퇴 후 함께 하자는 세계여행이다. 그가 소장한 클래식 우표의 가격은 장당 50만∼150만 원 수준이다. 클래식 우표의 가치는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데 카달로그 평가 가격에 따르면 그의 컬렉션은 약 50만∼60만 달러 수준으로 평가된다.

“우표를 갖고 해외여행을 떠나서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의 골목길 난전에서 팔자고 했어요. 프랑스에서 우표를 팔아 독일로, 거기서 또 이탈리아로 떠나는거죠. 한 장만 팔아도 며칠 동안의 여행 경비는 충분히 되잖아요.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했던 아내가 설득에 못 이긴 척 들어준 거죠. 그동안 남편의 ‘비싼 취미’를 참아준 아내에게 가장 고마워요.”

그는 내년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은퇴 후 아내와 한 약속을 지키려면 내년부터는 애지중지해온 우표를 하나씩 처분해야 한다. 처분 전에 우표 수집의 즐거움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현재 근무 중인 NH농협은행 신용산지점에 우표를 전시해놨다. 여분의 우표는 고객들에게 선물로도 주고 있다.

자식 못지않게 아낀 우표를 팔면 아까울 것 같다고 묻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충분히 즐겼어요. 만약 지금 불이 나서 이 우표들이 싹 불타 없어진다고 해도 별로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우표 수집하면서 연구하고, 들여다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어요. 물론 아내는 우표 팔아서 세계여행 갈 생각으로 지금까지 참아줬는데 아까워하겠죠(웃음).”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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