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흥표]‘도박중독 치료’ 정확한 조사가 먼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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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표 대구사이버대 교수
이흥표 대구사이버대 교수
최근 사행산업통합위원회는 우리나라의 도박중독 비율이 7.2%에 이르며 특히 남성은 10.6%, 사행산업 이용자는 무려 41%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내놓았다.

국가 경쟁력이 갈수록 곤두박질치는 마당에 이 정도면 도박중독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국가기관이 신빙성을 보증한다니. 물론 보고서에는 ‘위원회의 공식 의견이 아니다’란 친절한 면피성 발언을 빠뜨리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하려면 그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를 구하는 행동이 주목과 명분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행산업통합위원회는 기왕의 진단도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과감하게 미국도 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사용하지 않고, 전문가 사이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도박중독자가진단표(CPGI)라는 낯선 척도를 들여와 계속 사용하는 것 같다. 외국의 한 연구자가 임의로 만든 이 지표는 ‘중위험 도박’(중간 수준의 위험도가 있는 도박)이라는 모호하고 검증되지도 않은 범주를 중독에 포함시키고, 심리사회적 피해가 동반되거나 그 위험성이 높은 상태라면서 중독의 정의를 고무줄처럼 늘이는 데 여념이 없다.

또 사행산업통합위원회는 스스로가 2011년도 한국에 적합한 한국형 도박행동척도(KGBS)를 만들어 자랑하고도 이 척도에 의거한 결과는 전혀 내놓지 않았다. 이쯤 되면 객관적이고 투명한 통계자료를 생명으로 하는 조사방법론은 일찍부터 과학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도박 산업을 규제하려면 중독자가 엄청나게 많아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국민을 도박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도박중독 비율이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하고 남성 10명 중 1명을 중독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존중하는 과정과 절차에 있다. 조사를 수행하는 주체가 국가기관일수록, 민감한 사회병리적 사안일수록 이해 당사자 및 국민 모두가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조사를 실행해야 하며 분명한 이론적, 경험적 척도 및 근거에 의거한 결과를 제시해야 한다. 조사에 응한 사람들이나 사행산업 이용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자 국민이다.

국민을 도박으로부터 제대로 구해 내려면 먼저 국가기관과 전문가집단이 학문적 순결함과 절차적 공정성을 지키고 존중해야 한다. 2012년 사행산업통합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한국갤럽의 한국형 도박행동척도의 조사 결과는 가장 높은 위험 수준 도박과 그 다음 위험 수준을 합해 2% 이하로 알려져 있다.

다행이다. 온갖 지뢰가 널려 있는 이 핍진한 세상에서 한국의 남자들은 아직 건강하다. 문제가 있다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고치려는 자’의 정당성을 위해 실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않고 현상을 부풀리는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부디 당국이 정확한 진단 뒤에 치료법을 제시하길 바란다.

이흥표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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