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57>번역의 유토피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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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유토피아
―김재혁 (1959∼)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몇 권으로도 모자란다 말하던 이들이 생각난다. 우연히 타게 된 택시 기사 양반같이 다시 만날 확률이 없는 이가 문득 홀연히 제 마음의 개울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 우리는 저마다 사연 많은 삶을 살고 있다. 그 사연들이 저마다의 머릿속에 글자로 서 있단다. 우리 인간에게 글자, 언어가 없었으면 사연이 없었을까? 있더라도 좀 달랐을 테다. 시인 김재혁은 번역가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언어로 된 글을 다른 나라 언어의 글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인 그에게는 사연이 머릿속에서 글자일 테지만, 화가에게는 이미지일 테고 음악가에게는 음률일 테다. 사람 외 동물들은 저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리 비참한 처지여도 그저 고통스러울 뿐, 제 비참을 사연화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화가나 음악가처럼.

화자는 타자의 삶에 지극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면 그 사람의 삶, 머릿속 글자들이 우글거리는 게 보인다. 화자는 그 글자들이 술술 읽히는, 번역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읽어내기, 그 마음에 발을 디뎌보기는 ‘수초로 뒤엉켜 있고,/미끄러운 돌이’ 곳곳에 깔린 강을 건너는 일! 슬쩍 마음을 건네 봤더니 살짝 밀어내던 ‘늘 실패한 첫사랑’처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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