匠人이 도자기를 깨듯, 난 성에 안차는 커피 원두를 버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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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식당 착한 이야기]서울 연남동 커피숍 ‘카페 리브레’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진시장에 있는 ‘카페 리브레’는 인테리어도 독특하다. 서필훈 사장은 한약장을 원두커피 진열대로, 버려진 자개상을 테이블로 재활용한다고 했다. ‘리브레(libre)’는 스페인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진시장에 있는 ‘카페 리브레’는 인테리어도 독특하다. 서필훈 사장은 한약장을 원두커피 진열대로, 버려진 자개상을 테이블로 재활용한다고 했다. ‘리브레(libre)’는 스페인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서른 살에도 사춘기는 온다. 역사학자를 꿈꿨던 남자는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쓸 무렵 진로를 다시 고민했다. 평생 책상 앞에 앉아 ‘엉덩이 싸움’을 하며 사는 인생은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았다.

시인을 동경했으나 재능이 없었다. 일본 음식을 좋아했던 그는 일식요리사를 꿈꾸고 조리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당근으로 나비를 오리고 오이로 왕관을 만들어야 하는’ 일식의 엄격함에 금세 싫증이 났다.

무슨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을 품고 서울 성북구 안암동 학교 근처 커피숍 ‘보헤미안’에서 ‘죽돌이’로 지냈다. 자연스레 커피가 궁금해졌다. 유학을 떠나는 대신 ‘보헤미안’에 취업했다. 설거지와 바닥청소부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이 손에 익어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 신기했다. 잘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커피에 빠진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논문 스트레스로 인한 잠깐의 일탈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커피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흥미로웠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커피에서 ‘기예(技藝)’의 가능성을 본 거죠.”

올 4월 채널A ‘이영돈PD의 먹거리 X파일’ 착한식당 27호점으로 선정된 서울 마포구 연남동 커피숍 ‘카페 리브레’. 이곳의 서필훈 사장(37)은 커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단골 커피숍에서 일을 배울 때부터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지금까지 그에게 커피는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긍심의 대상에 가깝다.

그는 유난을 떤다 싶을 정도로 공들여 커피를 만든다. 품질 좋은 원두를 구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유명 커피 원산지를 수확시기에 맞춰 찾아간다. 그래서 1년 중 4개월 정도는 해외에서 지낸다. 올해에만 벌써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볼리비아, 인도, 브라질에 다녀왔다. 지금까지 쌓아둔 마일리지가 50만이 넘는다.

“지역에 따라 수확시기가 달라서 1년에 두 번 이상 방문하는 나라도 있어요. 최근에는 3주간 볼리비아와 콜롬비아, 브라질에 다녀왔는데 비행기만 17번 탔죠.”

산지에서 들여온 생두는 섬세한 로스팅과 추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바리스타인 그는 로스터와 감별사로도 유명하다. 2008년 국내 최초로 큐그레이더(국제커피감별사) 자격증을 땄고 지난해 월드로스터컵 대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했다. 그는 도예 장인이 마음에 안 드는 도자기를 깨듯, 커피 제조 과정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생기면 과감히 버린다. 로스팅 후 일주일이 지난 원두도 버린다. 버리는 원두가 더 많을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카페 리브레’의 커피는 프랜차이즈 커피와 ‘맛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자가 맛본 ‘카페 리브레’의 카페라테는 여느 라테와 달리 약간 신맛이 느껴졌다. 그는 원래 커피 열매가 가진 고유의 신맛이 로스팅 후에도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의 많은 커피숍이 원두를 까맣게 볶는 다크 로스팅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반면 저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라이트 로스팅 쪽에 관심이 많아요. 어떤 게 더 낫다고 할 순 없어요. 전자가 오래 고아낸 사골국물이라면, 후자는 데친 음식에 가깝죠.”

그는 커피 원두 수입 사업을 먼저 시작했다. “좀 더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 2009년 ‘보헤미안’에서 독립해 ‘커피 리브레’라는 커피 교육·컨설팅 업체를 차렸고, 이왕이면 품질 좋은 커피를 마시고 나누고 싶은 욕심에 생두 직거래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나라의 커피 전문가에게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 유명 커피 농장을 찾아갔다. 이렇게 그와 직거래 계약을 한 아시아와 중남미 지역 농장이 20개 가까이 된다. 커피 산지에 찾아가 직접 품질을 확인하고 직거래로 들여온 신선한 원두로 커피를 공급한다는 사실은 그의 카페가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중요한 이유였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커피 원두는 미국이나 일본의 대형 유통회사를 거쳐 들여온 생두를 로스팅해 만든 게 다수다. ‘카페 리브레’의 커피처럼 원두의 구체적인 생산지역이나 생산자, 유통과정 등을 알 수 있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커피도 요리와 똑같아요. 로스팅과 추출만으로는 한계가 있죠. 좋은 재료를 쓰는 게 커피 맛을 좋게 하는 데 가장 상식적이고 중요한 일이거든요. 한국에 앉아서 재료를 구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봤어요.”

그는 직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저렴한 가격이 아닌 관계라고 강조했다. 수해로 인해 가격은 오르고 품질은 떨어진 엘살바도르 농장의 커피를 ‘농장 복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생산자 측에서 제시한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사들인 적도 있다.

“오랫동안 좋은 커피를 공급받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면 우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가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관계가 유지된다면 나중에 커피 값이 급등하더라도 저희가 거꾸로 농장에서 도움을 받겠지요.”

이를 위해 사업 초기 감수해야 했던 경제적 손해는 적지 않았다. 그가 수입해온 커피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때문에 잘 팔리지 않았다. 그는 “품질 좋은 와인은 인정받지만 커피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커피 사업을 시작한 후 3년간 적자가 계속됐다. 지난해 ‘카페 리브레’를 연 것도 사실 남아도는 원두를 자체적으로라도 안정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전통시장(동진시장) 내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한, 월세 40만 원인 20m²(약 6평)짜리 공간은 짧은 시간 내 연남동의 명소가 됐다. 영화 ‘나초 리브레’의 마스크맨이 그려진 입간판과 한의원에서나 봄직한 한약장, 세련된 팝아트 작품이 어우러진 빈티지 풍의 커피숍은 동네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무엇보다 비싸지 않으면서도(4000원) 남다른 커피 맛 때문에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다. ‘착한식당’에 선정된 것도 그즈음 일이었다. 방송 후 한동안 연남동 시장 일대에 커피 마시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현실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방송 이후 사업 확장도 탄력을 받았다. 연남동에 이어 최근에는 한남동에도 ‘카페 리브레’지점을 열었다. 2명뿐이던 직원은 11명으로 늘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올 6월에는 익명인의 고발로 영업정지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원두 이용량과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제조허가가 나지 않은 건물에 설치한 로스터기를 사용한 게 주된 이유였다. 공장을 다시 구하고 제조허가를 새로 얻어야 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상세히 올렸다.

“어설프게 감추기보다는 모든 것을 솔직히 알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더 신뢰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센 백신을 맞았다고 생각해요.”

본래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이라는 서 사장은 “커피만큼은 한번도 싫증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커피를 통해 오랫동안 동경해온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 ‘커피 장인’으로서 “여전히 마음에 흡족할 만한 수준의 커피는 만들지 못하고 있지만 조금씩 기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위안을 받는다”고 했다. 더불어 고고학자처럼 커피의 숨겨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커피를 통해 본래의 꿈을 다 이룬 셈이다.

“제가 커피의 가려진 얼굴을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 잔의 커피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지만 그동안 커피는 누가 언제 지배한 것인지, 뭐가 섞였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잖아요. 그 이야기들을 다시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혼자서 괜히 우쭐해지기도 하죠.”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커피#카페 리브레#서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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