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필직론’]표 팔려는 유권자 있는 한 정치 선진국 어렵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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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부정부패는 정치인, 공무원들만 저지르는가?

그들의 부정부패를 그토록 혐오하는 국민들은 자신들도 썩었다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후보자들이 돈으로 표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권자인 국민들이 돈에 표를 팔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국민이 ‘선거’라는 말만 나오면 출마 준비자들로부터 무엇이라도 받아내려 한다. 그들이 돈을 주지 않으면 섭섭해하며, 무능하고 염치없는 인간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돈을 받는 것이 죄가 아니라 돈을 준 후보를 찍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러니 어떤 후보든 출마를 준비하면서부터 불법으로 돈을 쓰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불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선된 후보는 선거비용을 건지고, 다음 선거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썩은 정치는 썩은 선거에서 비롯된다. 타락한 정치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는 데는 유권자들의 책임이 크다.

전국에서 국회의원 및 지방의회 의원, 자치단체장, 단위조합장 등을 뽑는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추석은 악몽일 수밖에 없다. 추석이 낀 달은 평소 경상경비의 3∼5배 지출을 각오해야 한다. 가야 할 곳은 많고 보내야 할 곳은 더 많기 때문. 명절이 아니라도 통상적, 의례적 인사를 해야 할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한다. 어느 선거구든 각 마을 단위로 1년 내내 끊임없이 행사가 벌어진다. 체육대회, 위안잔치, 경로잔치 등등. 어김없이 초청이 오는 이런 행사,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얼굴을 비치고 10만 원 이상의 성금을 내놓아야 한다. 동호회 등 숱한 모임에서 선진 지역 견학 등의 이름으로 청와대,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전국 유명 관광지 유람에 나선다. 이 역시 빠지지 않고 성금과 함께 음료수와 술 등을 관광버스에 실어주어야 한다. 개인 행사도 헤아릴 수 없다. 칠순 잔치, 결혼식, 상가 등. 많을 땐 하루 10군데 결혼식에도 가야 한다. 평소 누구를 만나든 밥값을 내지 않고 돌아서면 그들의 표는 포기해야 한다.

출마 준비자들이 이렇게 돈을 쓰는 것은 모조리 선거법 위반이다. 그들도 잘 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주어야만 한다. 오라고 하는데 가지 않으면 흉 거리가 되고, 그냥 몸만 가면 가지 않는 것보다 더 욕먹는 현실 때문이다. 선거법은 엄격해졌으나 유권자 의식은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가 판치던 옛날 그대로이다. 유권자들의 요구에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후보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 뿌리 깊은 선거문화, 선거정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법망을 피하기 위해 돈을 주고받는 방법만 날로 교묘해진다. 어느 곳을 가든 돈을 대신 내줄 대리인이 필요하다. 한 출마 준비자는 “썩어도 너무 썩었다. 끝도 없이 돈이 들어간다. 유권자들이 달라는데, 주지 않으면 돈 없이 무슨 용기로 선거에 나오느냐는 눈총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출마 준비자들은 선거꾼들을 위해 돈을 들여야 한다. 평소 조직 관리를 위해 은밀한 돈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후보 경선에 나갈 경우 경선 선거인단을 상대로 대규모 매표 행위를 하는 것은 공공연할 비밀이다. 한 사람에게 수백만 원씩, 수백 명을 매수해야 하므로 한꺼번에 큰돈이 든다고 한다. 공천을 받기 위해 들이는 돈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로 알려져 있다. 어떤 선거든 몇 년 준비를 할 경우 수십억 원이 들 수도 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후 발표하는 선거비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선거비용 등을 뽑기 위해 본격적인 부정부패가 시작된다. 국회의원은 기초의회 의원이나 단체장 공천 대가를 챙긴다. 자치단체장들의 돈줄은 기업과 공무원들이다. 기업에 이권을 주고 대가를 받으나 불안한 구석이 있다. 인사를 통해 공무원들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 더 안전하다. 각종 승진과 전보마다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구속된 전군표 전 국세청장은 임명직이었으나 인사로 거액을 챙겼다. 선거로 뽑힌 기관장들은 오죽하겠는가. 돈으로 자리를 얻은 공무원 역시 그 돈을 뽑기 위해서 직무와 관련한 비리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세금 내는 국민을 위한 봉사는 뒷전이다. 이러한 매관매직의 악순환으로 입는 피해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국민들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후보자들로부터 받은 작은 접대가 선거의 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공직사회의 부패로 확대 재생산된다. 고질적인 선거정서에 유독 의존도가 높은 자치단체장 선거를 없애야 한다는 소리가 결코 허투루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라 전체가 무시무시한 부패문화에 휩싸여 있다’는 중국의 공산당은 경제성장으로 부패를 극복하겠다고 한다. 잘살게 되면 부정부패가 없어진다는 논리에서다. 우리도 경제만능주의에 빠져 국민소득 1만 달러만 넘으면 부정부패가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현실은 반대다. 얼마나 더 잘살아야 돈 달라는 유권자가 없어질까. 선거만이 아니다. 곳곳이 썩었으나 언제부터인지 국민도 정부도 부정부패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부정부패를 뿌리 뽑지 않고는 경제도약도 국가발전도 어렵다. ‘부정부패 척결’은 과거의 단어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하루빨리 개혁에 나서야 한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부정부패#유권자#선거법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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