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기쁜소리 고을’ 문경을 걷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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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웬 고갠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나네

1708년에 세워진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등뼈였다. 부산 동래읍성에서 서울 남대문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3, 4번 척추신경이었다. 과거길에 나선 수많은 선비들이 이 길을 따라 한양에 올라갔고, 또 대부분의 선비들이 낙방의 쓰라림을 안고 이 고개를 넘어 내려왔다. 김시습 이황 이율곡 류성룡 김만중 정약용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이 고개를 넘었다. 임진왜란 땐 왜군들이 이 길을 따라 쳐들어왔다가 다시 쫓겨 내려갔다. 조선통신사도 이 길을 따라 오갔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벼랑길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다산 정약용) 문경새재=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문경 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홍두깨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문경 새재는 웬 고갠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나네

문경 새재는 무슨 고개이길래

영남에 선비가 다 넘나든다

문경 새재를 넘어가신 님은

뉘게 잡히어서 못 오시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구전 ‘문경아리랑’에서>
문경새재(642m)는 한반도의 등뼈다. 척추신경 3, 4, 5번이나 같다. 이곳이 삐끗하면 나라 전체가 맥을 못 춘다. 허리 다친 사람이 꼼짝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새재에 떨어진 빗물은 북쪽으로 가면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남쪽으로 가면 낙동강물이 된다. 새재는 바로 남한강과 낙동강 들머리가 마주치는 곳이다. 으르렁대는 청룡(남한강)과 황룡(낙동강)이 서로 머리를 들이대어 우뚝 솟았다.

경계는 늘 힘과 힘이 부딪쳐 불안하다. 아래쪽의 달곰하고 비릿한 해양문화와 위쪽의 거칠고 원시적인 대륙문화가 이곳에서 사정없이 서로 머리를 들이댄다. 한양도성의 완고한 권력과 영남선비들의 꼿꼿한 딸깍발이 정신이 맞닿는 곳이 바로 문경새재다. 경계는 불안정하지만 늘 흥성거린다. 사람이 모이고, 장이 서고, 온갖 잡동사니가 몰려들어 전혀 다른 ‘꽃’을 피운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때 넘는 고개는 문경새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를 잇는 죽령(696m)과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잇는 추풍령(221m)도 있었다. 과거길 선비들은 반드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을 오갔다.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聞慶(문경)’은 글자 뜻 그대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게 된다’는 믿음을 줬던 것이다. 오죽하면 호남 선비들조차 에둘러 이곳을 통해 한양에 올라갔을까.

왜 새재일까. 문경의 열혈 문화해설사 이창근 선생(69)은 그 유래를 말한다. 그는 집 창고 구석에 ‘조총과 일본도를 쇠밧줄로 꽁꽁 묶어놓고’ 있을 정도로 피가 뜨겁다. 일제 만행을 한시라도 잊지 말자는 다짐의 표시다. 틈틈이 지게, 다듬이, 등잔 등 옛날 민족생활도구를 수집하기도 한다.

“보통 새재는 ‘새도 넘기 힘든 고개(조령·鳥嶺)’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억)새 우거진 고개(초점·草岾)’ 혹은 ‘하늘재(계립령·계立嶺)와 이우리재(이화령·伊火嶺) 사이(새)에 있는 재’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어떤 이는 하늘재(156년)에 이어 ‘새(新)로 연 고개’라고 말하기도 한다.”

요즘 문경새재길은 걷기 안성맞춤이다. 가을바람이 고슬고슬하다. 푸른 하늘 반공중에 제1, 2, 3관문이 덩그렇게 걸렸다. 바닥은 말랑말랑한 황톳길. 맨발로 걷는 맛이 쏠쏠하다. 길은 평탄하고 길섶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슴을 적신다. 진홍빛 물봉선꽃이 계곡에 가득하다. 도중에 도시락 까먹는 맛이 꿀맛이다.

‘V’자로 깊게 파인 늙은 소나무의 거북등껍질이 애처롭다. 일제 말기 송진을 채취한 생채기다. “저렇게 깊이 파인 민족의 상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는 이창근 선생의 죽비소리가 의미심장하다. 문경새재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곳 100선’에서 1위로 꼽혔다.

과거급제 빌던 돌탑에 합격기원 리본 주렁주렁
수험생 부모 단골 기도처 ‘책바위’

과거길 선비들이 급제를 빌던 문경새재 고갯마루의 책바위.
과거길 선비들이 급제를 빌던 문경새재 고갯마루의 책바위.
문경새재 고갯마루 부근엔 책바위가 있다. 둥그런 돌무더기 위에 돌부처가 서 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과거길 선비들은 이곳을 지나칠 때면 빠지지 않고 급제를 빌었다. 유학의 선비들이 불교의 돌부처에게 빌었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절박했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요즘은 ‘수능 대박’ ‘사업 번창’ ‘공무원시험 합격’ 등을 기원하는 리본이 주렁주렁하다. 사법시험 합격, 행정고시 합격, 서울대 합격, 교대 합격, 검정고시 합격 기원에서 우리가족 모두 건강, 아빠 승진, 사업 순조, 좋은 짝 만나게 해 주세요 등까지 ‘시험 합격’과 ‘건강 기원’이 주류다.

이 돌탑에 얽힌 이야기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인근의 어느 큰 부자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몸이 허약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귀한 음식에 온갖 보약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어느 도사가 ‘아들로 하여금 집의 돌담을 직접 헐어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게 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아들은 3년에 걸쳐 돌담을 헐어 책바위까지 옮겨 쌓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튼튼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했다.

왜 이 책바위에 ‘시험 합격’과 ‘건강’을 비는 사람이 많은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이곳에 수험생 부모들의 발길이 붐빈다.

아슬아슬 토끼비리길은 ‘조선의 차마고도’

반들반들 벼랑끝 토끼비리길.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바닥이 빤질빤질하다. 동아일보DB
반들반들 벼랑끝 토끼비리길.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바닥이 빤질빤질하다. 동아일보DB
문경새재길은 사실상 토끼비리길에서부터 제3관문까지의 60여 리(약 25km)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끼비리길은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로부터 구미∼상주∼함창∼점촌(문경시)을 거쳐 문경읍으로 들어오는 ‘문경새재길의 목젖’이다. 문경읍에서 남쪽으로 약 12km 거리. 보통 문경새재길은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6.5km, 조금 더 넓히면 고개 너머 이화여대 수련관이 있는 충북 괴산 연풍면 고사리마을까지 9.1km를 말한다.

토끼비리길은 영남에서 한양에 올라갈 때 가장 험한 벼랑길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군대가 이곳에 이르러 더 나아갈 수 없었는데, 그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 길을 튼 것에서 유래했다. ‘토천(兎遷)’ ‘관갑천(串岬遷)’ ‘관갑잔도(串岬棧道)’로 불리게 된 이유다.

잔도란 강가의 벼랑에 선반처럼 대롱대롱 달아서 만든 하늘길을 말한다. 영남대로상에는 문경 토끼비리, 밀양 작천, 양산 황산천 등 5곳에 잔도가 있다. 토끼비리의 ‘비리’는 ‘벼루(벼랑)’의 문경 토박이 말. 한자로 ‘천(遷)’이 ‘벼랑’이다.

토끼비리길은 바위를 파내 만들었다. 조선의 차마고도라고 할 수 있다.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층암절벽을 깎아냈다. 천여 년 동안 사람들 발길이 닿아 바닥이 개 코처럼 빤질빤질하다. 발을 내딛기 쉽게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낸 곳도 눈에 띈다. 폭은 0.3∼1m.

조선시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었다. 과거길 선비들도 예외가 아니다. ‘가마꾼과 마차도 이 길을 오갔다’는 기록도 있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좁아졌다. 흙과 바위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요새는 함곡관(函谷關)처럼 웅장하고/험한 길 촉도(蜀道)같이 기이하네/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다/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어변갑(1380∼1434)의 ‘관갑잔도’>

신립장군은 왜 호리병목 같은 새재를 지키지 않았을까
임진왜란과 문경새재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병사 1만8500명을 이끌고 한양도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음력 4월 15일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4월 21일 대구성, 4월 24일 상주성을 점령했다. 그런데 그 앞에는 험난한 문경새재가 버티고 있었다.

병사 한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문경새재 초입 토끼비리길과 그 뒤의 고모산성을 보고는 조선군의 매복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정탐병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선군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그의 병법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고니시는 바람처럼 문경을 점령하고 문경새재를 넘어 4월 28일 충주까지 진출했다. 조선 팔도대원수 신립 장군(1546∼1592)은 호리병목 같은 ‘하늘의 요새’ 문경새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부관들이 ‘조령을 지켜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말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조선군은 기병이 주력이라 넓은 곳에서 싸워야 유리하고, 도망병이 많아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배수진을 쳐서 죽기 살기로 싸우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그는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고, 조선군 8000명은 전멸했다. 신립 장군도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훗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새재를 지나면서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지킬 줄 몰랐으니…”라며 쯧쯧 혀를 찼다.

문경새재 골짜기엔 3개의 관문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군의 충고와 탄금대전투의 쓰라린 패배를 교훈 삼아 1594년 제2관문(조곡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다. 그 후 제1관문(주흘관)과 제3관문(조령관)은 1708년 완성됐다. 제1, 3관문 현판 글씨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1906∼1989)이 썼다.

■Travel Info

▼교통=문경은 점촌시와 문경군이 1995년 통합되어 시가 되었으며 2개읍(문경읍, 가은읍)이 있다. 문경새재는 문경읍에서 가깝다. 문경시의 점촌 지역까지 가면 다시 돌아 나오게 된다.

▽승용차=서울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새재나들목→문경읍→제1관문 ▽버스=동서울터미널→점촌(2시간 소요, 배차간격 30분), 강남터미널→점촌(2시간 소요)

▼먹을거리=문경은 약돌(게르마늄 셀레늄 세륨 홀뮴 성분을 함유한 거정석)을 먹여 키운 약돌식품이 유명하다. 약돌은 문경 주위에 흔한 광석으로 맥반석의 일종. 이를 곱게 갈아 돼지나 한우 사료에 섞여 먹이면 육질이 부드럽고 잡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약돌밭에서 키운 관음리 계곡의 약돌사과도 이름났다. 당도가 높고 씨알이 일반사과보다 굵어 비싸게 팔린다. ▽약돌돼지석쇠구이=광성식당(054-572-3466), 탄광촌식당(054-572-0154), 새재할매집(054-571-5600) ▽문경산채비빔밥(054-571-3736) ▽문경약돌한우타운(1588-9075)

♣색소폰 부부의 낭만찻집=제2관문 못 미쳐 팔왕휴게소 소요산방(054-572-2247). 시인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부부의 색소폰 실력이 빼어나다. 시와 차, 음악이 흐르는 낭만찻집.

♣조선백자8대종가=하늘재 아래 관음리 일대엔 도요지가 30여 곳이나 있다. 이 중에서도 ‘조선요’에 가면 8대째 이어온 조선백자의 흐름을 망댕이요박물관에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054-571-2536, 8450

♣대승사
=문경엔 이름난 절이 많다. 봉정암, 김용사, 윤필암, 묘적암…. 이 중 산북면 사불산의 대승사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의 예술성이 뛰어나다. 1675년 조성된 것으로 최근 국보 승격 신청을 했을 정도. 절에 들어갈 때의 구불구불 소나무숲길이 호젓하고 정겹다. 찻잔세트, 민들레조청, 경옥고 등을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3대 비구니선방의 하나인 윤필암은 대승사의 말사. 054-552-7105

♣온천=문경종합온천(054-571-2002), 문경기능성온천(054-572-3333)

♣문경 오미자축제(9월 20∼22일)
=문경은 전국 오미자의 45%를 생산한다. 오미자는 달고, 시고, 맵고, 짜고, 쓴맛의 다섯 가지 맛이 난다 하여 오미자다. 오미자차, 오미자막걸리, 오미자비누, 오미자청 등 관련 제품도 다양하다. 일반오미자 kg당 1만1000원. 문경시유통사업단(054-555-1158).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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