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갑작스러운 정전… 욕망의 늪에서 허영의 꽃이 피는구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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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블랙코메디’ ★★★☆

연극 ‘블랙코메디’ 중 한 장면. 어둠 속에서 위태로운 욕망의 줄다리기를 벌이던 주인공 밀러(가운데)가 차츰 궁지에 몰린다. 극단 성좌 제공
연극 ‘블랙코메디’ 중 한 장면. 어둠 속에서 위태로운 욕망의 줄다리기를 벌이던 주인공 밀러(가운데)가 차츰 궁지에 몰린다. 극단 성좌 제공
막이 오르고 2분쯤 뒤, 관객은 안구 홍채의 기능을 확인하게 된다. 7일 개막한 연극 ‘블랙코메디’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연 전 무대에 오른 주연배우 설성민(브린즈리 밀러 역)의 설명대로 “불이 들어온 상황에서는 조명을 끄고, 정전이 되면 조명을 켠다.” 칠흑 속에서 눈앞이 환히 보이는 듯 연습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이 희끄무레 시야에 들어올 때쯤 화들짝, 조명이 밝혀진다.

“무슨 일이지? 이런…. 전기가 나갔어!”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능청스럽게 바닥과 벽을 더듬거리는 배우들. 누군가 라이터와 성냥불을 밝히거나 손전등을 들면 ‘약간 밝아졌다’는 신호로 조명이 살짝 어두워진다.

독특한 설정으로 인한 흥미로움은 길지 않다. 홍채의 작용으로 안구가 금세 빛의 변화에 익숙해지듯, 가짜 정전에 허둥대는 배우들의 몸짓이 유발하는 웃음은 곧 사그라진다. 음영을 반전한 장치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는 어둠 속에서 삐죽 고개를 내미는 인간 욕망의 본성을 환한 빛 아래 낱낱이 펼쳐낸다.

2008년 영화로 만들어진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와 나란히 놓이는 시선이다. 밝은 빛에 가려지고 억눌려졌던 행동과 말이 어둠을 틈타 어떤 식으로 배출되는지.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상대역과 관객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무대 위 일곱 인물은 몰래 험담하고, 몰래 가슴과 엉덩이를 더듬고, 몰래 키스하고, 몰래 물건을 훔치고, 몰래 서로의 뒤통수를 때린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살인과 성폭행의 광풍에 휩쓸려가는 이야기를 그린 사라마구의 잔인한 비관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 바람둥이 한량 밀러는 어둠 속에서 두 여인의 마음을 희롱하다가 요행 찾아온 천재일우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다. 의미를 잠깐 고민해보든지 그저 웃어넘기든지, 강요는 없다. 관객의 자유다.

사람들은 극 중반 등장한 전기 수리공을 미술 애호가인 갑부로 착각한다.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분위기에 취한 수리공이 억눌려 있던 허영의 욕망을 대뜸 드러낸다. “위대한 예술은 늘 이해하기 쉽죠. 간단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독창적이지만 독단적이지 않아요.”

경쟁적으로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은 그의 정체가 밝혀지자 “주제 모르는 엉터리 인간”이라며 죽일 듯 몰아세운다. 사회적 명망이 구축되는 과정의 어처구니없음에 대한 뼈 있는 농담. 억지 없는 유머에 가볍지 않은 성찰을 자꾸 젓가락 가는 나물무침처럼 소박하게 버무렸다. 익숙하고 정겹지만 맛보기 힘든 반찬을 닮았다.

5년 전 작고한 권오일 전 극단 성좌 대표의 추모공연 마지막 작품이다. 권 연출은 2002년 부산시립극단에서 이 작품을 국내 초연했다. 객석 출입구 앞에 간소한 추모단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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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아 연출. 조주현 구본임 인성호 강경덕 서주성 박선정 김미라 출연. 22일까지 서울 대학로 엘림홀. 3만 원. 070-8804-9929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블랙코메디#정전#눈먼 자들의 도시#권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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