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태현]사람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건 역시 ‘사랑’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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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국 공적개발원조도 소프트파워로 여기는 국제사회
그러나 돈으로 마음 살 수 없어… 진짜 강한 권력은 사랑받는 권력
교원 가르치러 갔던 미얀마… 그곳 제자들에게서 교훈 배워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지난 10년간 인구에 가장 널리 회자된 국제정치 용어를 꼽으라면 단연 소프트파워다. 1990년에 처음 사용된 이 말은 군사력 경제력과 같은 하드파워 즉 실력(實力)과 대비되어 흔히 매력(魅力)으로 번역돼 왔다. 그러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유명해졌다. 왜 우릴 미워하는가? 그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러나 이 개념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문제가 많다. 누가 뭐래도 권력은 권력이다. 이런 권력, 저런 권력으로 나누는 것은 본질을 흐릴 뿐이다. 무엇보다 소프트파워를 어떻게 키우고 행사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실력은 나의 수중에 있지만 매력은 남의 심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실로 강한 권력은 사랑받는 권력이다. 저항하지 않으니 손실이 없고 스스로 따르니 오히려 배가된다. 그래서 국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소프트파워 증진에 노력해왔다. 미국문화원이나 공자학원과 같은 공공외교가 대표적이다.

공적개발원조(ODA)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지구촌 동포에 대한 박애주의로 포장해도 그것이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되는 한 국익과 국력, 즉 소프트파워 증진에 도움이 돼야 한다. 그러나 돈으로 마음을 사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자칫하면 돈 주고 욕먹기 십상이다.

필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인연으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 대학의 젊은 교원들을 가르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 겨울방학 두 달, 그리고 이번 여름방학 두 달. 첫 학기가 끝났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三拜)를 했다. 당황했지만 관습이려니 했다.

실제로 미얀마에는 그런 문화가 있다. 국민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이곳 사람들은 수행을 통한 해탈을 추구한다. 부처도 복을 내리는 신이라기보다 수행을 돕는 선생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들이 ‘쌔야’라고 부르는 선생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다. 불사부일체(佛師父一體)라고나 할까? 사원에서 보니 우리에게 한 절이 과연 부처께 올리는 절과 같았다.

올 7월, 짧은 방학을 이용하여 학생들과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평생 잊지 못할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옛 수도 만달레이를 거쳐 천년 고도 바간으로 가는 길에 포파 산을 들렀다. 평지에 우뚝 솟은 산으로 정상에 영험한 사원이 있단다. 사원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길게 이어진 계단을 걸어 올랐다. 타일이 깔린 길은 마침 내린 비로 몹시 미끄러웠다. 게다가 원숭이들이 극성이었다. 정글북에서 모글리를 납치한 그들처럼 사나워 보였다.

용기를 내어 걸음을 떼는데, 무섭다며 몰려 있던 여학생 중 둘이 앞장서며 길을 열었다. 그 뒤를 따르다 곳곳에 널려 있는 원숭이 똥을 밟아 미끄러졌다. 미끄러워 넘어질 뻔한 건 둘째 치고 사람 똥을 밟은 듯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다 눈을 의심했다. 앞선 여학생이 발로 그것들을 치우며 가고 있었다. 사원이니 당연히 맨발이었다.

다음 날 바간에 갔다. 수천 개의 사탑 중 몇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일몰을 본다며 큰 사탑에 갔다. 외벽에 좁은 계단을 파고 철제 손잡이를 달았는데 몹시 높고 가팔랐다. 남달리 심한 고소공포증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 타는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문제는 내려가는 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앞장서려는데 학생들이 기겁하며 말린다. 그러더니 다섯 명이 필자보다 앞에 서서 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실수로 넘어지면 아래로 떨어질 수 있으니 그 경우 자신들의 몸으로 막겠다는 뜻인 걸 알았다. 울컥! 가슴이 뜨거워지고 먹먹해졌다. 이런 사랑이라니. 마치 어머니의 사랑 같지 않은가.

이후 마음을 활짝 열고 그들을 봤다. 나는 사랑으로 대하고 지성으로 가르치려 애썼다. 그랬더니 그들이 가진 하늘 같은 존경, 바다 같은 사랑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사업에서 우리는 미국인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들도 미얀마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며 열심이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가 서로 사랑을 다투는 연적이라면, 단언컨대 승자는 우리다. 마음을 얻는 건, 베푸는 온정이 아니라 공명(共鳴)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교직 생활 20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학생들은 강아지와 같아 예뻐하는 만큼 따른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입에 발린 말이 되고 만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럽고 그들에게 미안하다.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소프트파워#권력#미얀마#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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