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 늘었는데 추심인은 줄었다… ‘빚의 패러독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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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춘(가명·39) 씨는 최근 카드대금 약 400만 원을 연체한 사람의 집을 찾았다. 신 씨는 금융회사를 대신해 빚을 받아내는 채권추심인. 그가 여러 번 전화하자 연체자는 “국민행복기금에 빚을 줄여달라고 신청할 생각이니 더이상 독촉하지 말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신 씨가 찾아간 연체자의 집은 전용면적 150m²의 중형 아파트였다. 집으로 찾아갔을 때 문틈으로 비싼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체자는 고급 승용차도 몰고 다녔다. 재산을 남의 명의로 해놓고 빚을 갚지 않고 있는 것.

신 씨는 “성실하게 빚을 갚는 사람이 많지만 여유가 있어도 국민행복기금이나 개인회생제도를 방패 삼아 빚 상환을 미루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하소연했다.

가계부채가 1000조 원에 육박하는 시대, 다양한 이유로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 경기 침체로 빚을 갚기가 더 어려워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부채 구제 제도를 악용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2009년 1만6000명을 웃돌았던 신용정보업계의 채권추심인 수는 지난해 말 1만3455명으로 줄어들었다. 빚을 받아내는 전문가들마저 포기한 채무자들이 늘고 있는 셈이다.

○ 채무조정제도 뒤에 숨는 연체자 늘어

국민행복기금 등 채무조정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추심인은 연체자에게 빚 독촉을 중단하도록 돼 있다. 채무조정 신청자 대부분은 성실하게 빚을 갚는 편이지만 최근 제도가 크게 홍보되며 이를 악용하는 이들도 늘었다는 게 추심인들의 얘기. 이런 배경으로 4월 출범한 국민행복기금의 실적 경쟁도 한몫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추심인 이상경(가명·60) 씨는 최근 한 채무자로부터 “국민행복기금에서 빚을 감면해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황당했다. 이 채무자는 연체금액이 8억 원에 달했는데 국민행복기금 신청 자격은 빚이 1억 원 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그 사람은 젊은 전문직 종사자라 빚을 갚을 여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채무자로부터 “국민행복기금 담당자가 연체금액을 1억 원 이하로 쪼개 신청하면 혜택을 받게 해주겠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국민행복기금을 운영하는 한국자산관리공사 관계자는 “1억 원 이상의 빚을 쪼개는 방식으로 감면받을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씨는 “공사의 일부 직원이 실적에 급급해 원칙 없이 채무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주장했다.

8월 기준으로 국민행복기금에 채무조정을 신청하는 사람은 하루 평균 760명. 7월 하루 평균 신청자 290명에 비해 2.6배로 늘었다. 8월 30일 현재 누적 신청자는 14만6288명에 달한다.

채무액이 15억 원 이하인 사람에게 이자나 원금을 감면해주는 개인워크아웃과 사전채무조정제 신청자는 2006년 8만5826명에서 지난해 9만126명으로 증가했다. 강호석 한국은행 금융제도팀 과장은 “2005년 이후 가계대출이 계속 느는 가운데 최근 경기회복이 지연되자 채무 구제프로그램 신청자 증가폭이 최근 늘고 있다”며 “이런 증가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자포자기 채무자’ 증가


그런가 하면 경기침체로 빚 갚기를 아예 포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추심인 정민정(가명·여) 씨는 최근 난생 처음 채무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늘 전화를 거는 쪽은 빚 독촉을 하는 정 씨였는데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전화해온 것. 500만 원대 빚을 8년간 못 갚고 있던 이 채무자는 “일자리가 생기지 않아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정 씨는 “채무자의 사정이 딱해 빚을 감면받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건설업체에 설비를 납품하던 장모 씨는 건설사가 미분양 사태로 부도를 맞으면서 납품대금을 받지 못했다. 받아야 할 돈은 약 12억 원. 납품 당시 빚을 내 설비를 제작했던 장 씨는 “다른 일감이라도 있으면 버티겠지만 경기가 나빠 막막하기만 하다”며 “지금 심정 같아선 자포자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6개월 이상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2월 기준으로 345만 명이다. 금액으로는 39조7000억 원. 이는 채무가 1억 원 미만인 경우만 집계한 것으로, 그 이상의 빚을 낸 사람까지 합치면 연체 규모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심인 손을 떠난 빚, 불법 대부업체로 흘러들어

도덕적 해이의 확산과 자포자기형 채무자의 증가는 채권추심인 수의 감소라는 현상을 낳고 있다. 빚을 받아내기 어려워지면서 소득이 줄어든 추심인들이 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합법적 추심회사의 모임인 신용정보협회에 등록된 채권추심 담당 직원은 2007년 말 1만5541명에서 2009년 말 1만6221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2011년까지 1만5000명을 웃돌았으나 지난 한 해 동안 1824명이나 줄어들면서 1만3455명이 됐다.

채무자들이 상환을 계속 미뤄 오래 묵힌 ‘악성 빚’은 금융사의 손을 떠나 금융감독의 사각지대인 대부업체로 흘러들고 있다. 기경민 신용정보협회 기획본부장은 “국제회계기준(IFRS)이 도입된 뒤 금융사의 채권이 회계상 부실로 잡혀 매각되고 있다”며 “대부업체들이 이 채권을 대거 사들인 뒤 다시 소액으로 나눠 다른 불법 대부업체에 나눠 팔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금융사를 떠난 빚이 대부업계로 넘어가 서민들이 불법 추심에 더 시달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불법 대부업체는 금융당국의 관리를 제대로 받지 않아 불법 추심이 쉽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대부금융협회가 대부업체 이용자 35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14%가 불법 추심 피해를 봤다고 답했다.

합법 추심을 그만둔 추심인들이 불법 대부업체로 이직한다는 얘기도 돌고 있다. 국내 한 금융지주계열의 신용정보사 관계자는 “추심인들이 빚 회수 물량이 줄어든 합법 신용정보회사를 떠나 대부업체로 옮겨가고 있다”며 “대부업계는 은행에 비해 금융당국의 관리감독이 덜해 비교적 추심 업무를 하기가 수월하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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