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경제’ 아직도 모험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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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벤처기업 3만개 시대 열린다는데… 기업환경은 69점

《 이르면 다음 달 벤처기업 3만 개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중소기업청이 운영하는 벤처포털 벤처인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국내 벤처기업은 2만9336개다. 1998년 2000개 수준이던 국내 벤처기업은 벤처 붐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1년 1만 개를 돌파했다. 2010년 2만 개를 넘어선 데 이어 3년 만에 다시 3만 개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급성장하고 있는 외형과 달리 벤처 생태계의 속은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가 벤처 전문가 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문가들은 국내 벤처 생태계를 100점 만점에 69점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

○ 벤처 생태계, 덩치는 커졌지만

전문가 설문조사에는 김기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남민우 벤처기업협회장,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사장, 박남규 서울대 교수, 이민화 KAIST 교수, 이은정 여성벤처기업협회장, 장흥순 서강대 교수, 정수환 앱디스코 대표, 조규곤 파수닷컴 대표, 최병원 스틱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참여했다.

이들은 국내 벤처 생태계에 대해 ‘덩치는 커졌지만 건강은 나빠졌다’고 진단했다. 새 정부가 ‘5·15 벤처·창업 자금 생태계 선순환’ 정책을 내놓았지만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창업자 연대보증 제도 △인수합병(M&A) 시장 마비 △정부 주도 지원의 부작용을 ‘고질병’으로 꼽았다.

2007년 열효율 기술 개발 벤처기업을 세운 김모 씨(43)도 창업자 연대보증 제도 때문에 무너졌다. 밤낮으로 뛰었지만 회사는 채 3년을 버티지 못했다. 김 씨는 “국내에서 민간 벤처캐피털 투자를 받는 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연대보증 대출만이 유일한 길이었다”며 “지금 남은 건 3억여 원의 부채와 신용불량자 낙인이 전부”라고 말했다.

창업 실패가 인생 실패로 이어지면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벤처 창업을 갈수록 꺼리는 추세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01년 20, 30대 청년 벤처 최고경영자(CEO) 비중은 56.1%로 절반을 넘었지만 2011년에는 18.5%로 급락했다.

이민화 KAIST 교수는 “정부가 5·15 대책을 내놨지만 창업자 연대보증 문제는 건드리지 못했다”며 “이 문제를 놔두고 벤처를 활성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연대보증에 대한 대안 없이 창조경제로 가자며 10만 명의 젊은이에게 창업을 권한다면 5년 뒤엔 대략 50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생길 것”이라며 “정부 기금 융자의 경우 연대보증 대신 0.5% 정도의 가산보증료를 더 받는 안을 고려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 퇴로가 없는 한국 벤처

일각에서는 3만 개 벤처 중 상당수가 사실상 벤처기업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허수’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M&A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국내 벤처시장의 특성상 기업을 정리하고 싶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끌고 가는 벤처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최병원 스틱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한국에서는 대기업들이 유망 벤처기업을 안 사기 때문에 벤처기업들은 잘돼도, 못돼도 손을 털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장흥순 서강대 교수 역시 “기술 있는 벤처기업들이 4, 5년 안에 제값 받고 기업을 팔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또 새로운 기술에 도전해야 역동성 있는 벤처 환경이 만들어진다”며 “하지만 국내에서는 코스닥 상장 외에는 돈을 회수해 새로 도전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국내 벤처기업들이 코스닥 상장까지 가는 데 평균 14년이 걸리고, 그나마도 100개 중 1개 정도만 상장에 성공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벤처가 대기업에 인수되면 ‘먹혔다’고 표현하는 부정적 인식을 없애는 한편 대기업의 벤처 인수를 가로막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출총제를 폐지하진 않더라도 벤처 인수에 대해서는 예외로 인정해 주는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초기 벤처에 집중 지원하는 건 문제

‘창조경제’를 슬로건으로 내건 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벤처 육성에 적극적이다. 특히 신규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신생 벤처 중심 지원이 얼마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KDI에 따르면 2005년에는 전체 9732개 벤처 중 4.2%(405개)가 코스닥에 상장했으나 2010년에는 2만4645개 벤처 중 1.2%인 295개가 상장하는 데 그쳤다. 김기완 KDI 연구위원은 “정부 지원으로 2006년 이후 벤처기업 수가 급증했지만 코스닥 상장 벤처기업이 줄어든 것을 보면 정책 효과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이 초기 벤처기업에 집중되면서 제2, 제3의 도약이 필요한 벤처들은 소외되는 것도 문제다. 정수환 앱디스코 대표는 “창업 3년차에 자리를 잡아 해외 진출을 적극 꾀하고 있지만 정부 지원이 ‘창업 1년 이내, 직원 수 9인 이하’ 등 조건이 붙어 막막하다”고 말했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사장은 “정부가 벤처기업이 몇 개 생겼고 일자리가 몇 개 생겼다고 강조하는 것도 문제”라며 “시간이 걸려도 벤처 생태계가 자생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내 민간 벤처캐피털 시장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2003년 128개였던 창업투자사는 2012년 105개로 줄었고 납입자본금 역시 1조9651억 원에서 1조4455억 원으로 줄었다.

이은정 여성벤처기업협회장은 “5·15 대책이 나온 지 3개월 이상 지났는데도 벤처업계에선 별 움직임이 없다”며 “정부는 정책을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우선·강유현 기자 imsun@donga.com
#한국벤처#벤처기업#코스닥 상장 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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