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제로’ 난장판 수업에서 아이디어 솔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 서울공대 ‘디자인 싱킹’ 체험해보니

‘패스트푸드점에서의 경험을 디자인하라’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 학생들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느낀 점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생각나는 문제점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은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다. 이 과정에서 서로 생각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최새미 기자 saemi@donga.com
‘패스트푸드점에서의 경험을 디자인하라’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 학생들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느낀 점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생각나는 문제점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은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다. 이 과정에서 서로 생각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최새미 기자 saemi@donga.com
“햄버거와 콜라, 감자튀김을 담는 튼튼한 종이가방을 만들어 양 옆에 찍찍이(벨크로)를 붙여놓으면 이동할 때는 음식물이 쏟아지지 않고, 먹을 때는 쟁반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많게는 일곱 살이나 위인 기자와 한 조가 된 학생들은 서로 어색해했다. 그러나 어색함도 잠시 뿐, 말문이 트인 ‘지하이조’ 구성원들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이를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나갔다. 그러다 보니 벽은 어느새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아이디어를 구현하려고 색종이와 우드록 등 공작용 재료를 자르고 붙이다 보니 강의실은 ‘난장판’이 됐다.

○ 생각나면 무조건 말하라

바로 서울대 공과대학이 미국 스탠퍼드대 디자인스쿨 강의를 도입해 지난달 26∼30일 닷새간 진행한 ‘공학도를 위한 창의적 사고’ 강의 현장이다.

스탠퍼드대 디자인스쿨 강의의 핵심은 ‘디자인 싱킹’. 학생들은 이를 통해서 협업방식과 인간 중심 사고를 배울 수 있다.

‘창조경제’를 이끄는 아이디어 도출 방법으로도 꼽히는 디자인 싱킹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기자는 어린 학생들 사이에 끼여 수업에 참여했다. 강의는 스탠퍼드대 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트레벨로시티, 구글 등을 거쳐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인 시트릭스에서 수석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김정우 교수와 스탠포드대 기계공학과 박사과정의 구제민 씨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첫날 지하이조는 ‘패스트푸드점에서의 경험을 디자인하라’는 과제를 받고 ‘관찰 및 인터뷰’에 나섰다. 몇 번이나 햄버거를 주문해 먹으면서 자신의 경험을 세세히 되짚어보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고객들과 인터뷰도 했다. 각자가 패스트푸드점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사람들의 ‘니즈’를 발견하는 ‘문제점 발견’ 과정에서는 ‘대기 시간이 지루하다’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음식을 떨어뜨리기 쉽다’ 등의 지적이 나왔다.

조해송 씨(21·기계항공공학부 3년)는 “별생각 없이 이용하던 패스트푸드점을 하나씩 짚어가며 이용하다 보니 ‘불편한 점이 이렇게 많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문제 해결책을 고민하는 ‘브레인스토밍’ 시간. 김 교수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비판을 하지 말라”고 전제하고 “이야기 흐름은 물론이고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말고,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무조건 말하고 포스트잇에 써 붙이라”고 지시했다.

○ 비판 없는 토론? 융합의 밑거름

무비판적인 분위기는 다양한 학생들의 협업을 가능케 했다. 다른 사람이 낸 아이디어를 일단 수용하고 포스트잇에 써 붙여 놓다보면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들끼리 합쳐지는 것에 많은 학생들이 신기해했다. 비판하는 것이 일인 기자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지적을 하지 않기 위해 한동안 진땀을 뺐다.

김 교수는 스탠퍼드대 학생들과 서울대 학생들의 차이점을 묻자 “똑같다. 서울대 학생들이 처음엔 조금 낯설어하며 소극적이긴 하지만 금세 적극적인 자세로 변한다”고 답했다.

다음 날, 아이디어 중 몇 가지를 골라 시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지하이조의 ‘찍찍이 햄버거 쇼핑백’뿐 아니라 ‘빈 자리를 알려주는 학생식당 의자’ ‘바닥이 보이는 투명 쟁반’ 같은 시제품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시제품을 들고 다시 패스트푸드점을 찾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수정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런 현장과 소통을 통한 시제품 개선 작업은 수업 기간에 수십 번 반복된다.

수업을 진행한 구제민 씨는 “다이슨 청소기는 고객의 의견을 반영해 시제품을 5200번 정도 만들었는데, 그 결과 일반 청소기보다 4배나 비싼데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혁신적 제품이 나왔다”며 “디자인 싱킹을 통해 현장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인간 중심적 사고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수업을 들은 이강욱 씨(21·건축공학과 2년)는 “이번 수업을 통해 일상 경험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문제를 발견하려는 태도를 갖게 됐다”며 “친구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강의”라고 말했다.

이신형 서울대 공대 학사부학장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이 수업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청강하는 사례가 있다”며 “앞으로 공학 수업에서 디자인 싱킹을 적용하는 노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새미 동아사이언스 기자 saem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