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유성식]종북(從北)의 맨얼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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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식 시대정신 상임이사
유성식 시대정신 상임이사
‘이석기 사태’는 가히 충격이다. 언론이 보도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추종자들의 대화 녹취록에 담겨 있는 것은 영락없는 국가전복 모의다. ‘전쟁’ ‘후방교란’ ‘사제폭탄’ ‘총 제조’ ‘국가시설 파괴’ ‘총공격 명령’ 같은 전시용어가 난무하고,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결의도 나온다. 특히 이석기 의원은 “실질적, 물질적으로 강력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당장 준비하기 바란다”고 말해 당시 대화가 단순한 의견교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지난해 총선에선 가면을 쓰고 표를 달라고 해 어떤 이는 의원이 됐고, 당은 국가보조금을 받았다. 지지율이 바닥을 치자 중도 사퇴했지만, 대선후보까지 냈다. 국민들이 경악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386세대의 눈에는 놀라움이 조금 덜할 수도 있다. 시계를 1980년대로 돌려보면 당시 대학가에는 80년대 초부터 ‘폭력혁명병’에 걸린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넘쳐났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적개심도 작용했지만, 대한민국을 ‘국가독점자본주의’ 또는 ‘반(半)봉건 반(半)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무력투쟁에 의해 기존 체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의식화 그룹이 급속히 늘어났다. 학내 언더서클을 중심으로 은밀히 읽히던 ‘인식과 전망’이라는 유인물에도 ‘북한과 연계한 무장투쟁’ ‘시가전’ 등이 언급돼 있었다.

이런 경향은 북한을 배후로 하는 민족해방(NL) 계열이 80년대 중반 이후 운동권을 장악하면서 더 뚜렷해졌다. 북한의 군사력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의 필수요건이 됐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1992년 4월 남한의 자생 주사파 지하당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에 공작금과 함께 권총과 실탄을 전달한 적도 있다. 이 의원은 당 산하 경기남부위원장이었다. 맥락이 이렇기 때문에, 북한과 연계돼 창당된 민혁당 간부로 활동했으면서 공개 사상전향을 한 적이 없는 이 의원과 같은 사람들이 체제 전복과 전쟁 운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종북세력은 1980년대에서 사고가 멈춰버린, 정신세계에 있어선 고립된 섬과 같은 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대오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이번과 같은 최면작업을 지속적으로 했을 개연성도 있다. 이것이 종북의 맨얼굴이다. 그들은 무슨 이념토론이나 하려는 집단이 아니다. 현실성이 있든 없든 종국에는 북한과 함께 무력으로 남한을 적화하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또 전략과 조직, 선동에 고도로 훈련된 프로여서 진보진영 내 영향력은 그 수에 비해 막강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체가 모호하게 보였던 것은 그들과 그들을 지렛대로 눈앞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주변 세력이 ‘역(逆)색깔론’으로 초점을 흐렸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당 안팎의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통진당과의 연대를 강행했다. 민혁당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석기를 신속히 사면·복권해 그의 오늘이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 것은 노무현 정부였다.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고 했던 정치인도 있다.

이 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됨에 따라 내란음모죄가 성립하느냐를 둘러싼 법리적 논란이 본격화하겠지만, 그것은 둘째 문제다. 우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적나라한 맨얼굴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 집단의 목표로서 무장폭동과 국가시설 파괴 등을 입에 담은 것이다. 실행시점과 구체적 방법까지 정했는지는 그 다음 포인트다. 이 의원 등 핵심 인물이 내란음모죄로 감옥에 가든지 가지 않든지 그들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한민국은 중대한 분수령을 맞고 있다. 이번 수사는 진보를 가장해 온갖 갈등을 증폭하면서 체제 전복을 노리던 사람들을 제대로 색출해 도려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것 없이는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정치·사회의 업그레이드는 불가능하다. 여야 정치권이 수사 방해나 여론호도 행위를 하지 말고 사법부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신중하게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상황이 엄중한데 국정원의 압수수색 시점 등에 대한 의혹 같은 것은 지나치게 가볍다.

유성식 시대정신 상임이사
#이석기#통합진보당#종북#체포동의안#내란음모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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