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만들라”… 한강도 꺾지 못한 ‘정조 思父曲’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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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in 서울]1795년 노들나루 도강

배다리 도강 행렬 재현 2007년 하이서울페스티벌 프로그램으로 배다리를 건너는 조선 정조 반차 행렬을 재현한 모습. 서울시 제공
배다리 도강 행렬 재현 2007년 하이서울페스티벌 프로그램으로 배다리를 건너는 조선 정조 반차 행렬을 재현한 모습. 서울시 제공
《서울은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도시다.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켜켜이 쌓여온 역사 속의 이야기들과 함께 미처 몰랐던 모습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본부장 한문철)는 한강 한양도성 동대문 세종대로 한성백제 등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큰 공간들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스토리텔링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심과 문화유적지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된 관광자원을 시 전역으로 확대함으로써 역사 속의 서울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겠다는 것이다. 서울에 숨겨진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을 찾아 매주 소개한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을 건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차를 타고 다리만 건너면 된다. 내년 11월 완공 예정인 구리암사대교까지 합치면 한강 다리는 모두 30개. 이 다리들로 강의 이편과 저편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 끝없이 오간다.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었던 한강에 최초로 놓인 다리는 조선시대의 주교(舟橋·배다리)다. 선왕의 능을 참배하는 왕의 도강을 위해 배를 밧줄로 엮어 만든 임시 다리다. 주교를 가장 많이 이용한 왕은 정조다.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경기 수원에 조성한 이후 매년 한 차례 이상 이곳을 방문하려 한강을 건넜다.

1789년 12월 정조는 배다리 전담 관청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했다. 주교사에서 검토한 배다리를 놓을 후보지는 노들나루(현재 한강대교 일대), 동호(현재 동호대교 일대), 빙호(동빙고·서빙고 지역, 동작대교 인근) 등으로, 오늘날 주요 한강 다리가 놓인 지점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강폭이 좁으면서도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고 수심도 깊은 노들나루가 최종 건설지로 선정됐다. 이 유역 한강의 폭은 330∼340m. 1916년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첫 다리인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가 이곳에 지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의 한강 도강의 하이라이트는 1795년 2월. 정조와 신하, 악대, 나인, 군졸 등 6000여 명과 말 780필로 이뤄진 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행렬은 파자전 돌다리(현 서울 종로구 단성사 앞), 숭례문, 청파교(현 서울 용산구 갈월동 쌍굴다리 부근)를 거쳐 한강에 도착했다. 한강에는 이미 11일 동안 공사해 배다리를 놓았다.

다리를 놓는 데 36척의 배가 징발돼 쓰였다. 다리는 모양과 실용성을 고려해 가운데는 높게, 양쪽 끝으로 갈수록 낮게 만들었다. 다리의 양편에는 파(把·180cm)마다 난간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잔디를 깔았다. 배다리는 5년 전 정조가 직접 쓴 책인 ‘주교지남(舟橋指南)’의 내용대로 만들었다. 배 12척의 호위까지 받으며 정조 일행은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배다리를 건넌 다음 노량진에서 잠시 쉬며 점심을 먹은 뒤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왕이 돌아와 강을 건너면 배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서울 동작구 본동에 있는 ‘용양봉저정’. 조선 정조가 배다리로 한강을 건넌 뒤 점심을 먹으며 쉬던 행궁이다
서울 동작구 본동에 있는 ‘용양봉저정’. 조선 정조가 배다리로 한강을 건넌 뒤 점심을 먹으며 쉬던 행궁이다
현재 서울 동작구 본동주민센터 뒤에 있는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은 정조15년(1791년)에 지어진 행궁으로, 정조가 잠시 쉬어 가던 곳이다. 처음 지을 때에는 정문이 있고 주교사로 쓰는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1930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에 온천장, 운동장, 식장 등을 두어 오락장으로 삼고 그 이름도 용봉정으로 고쳤고, 요정으로 쓰이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다시 국유로 환원된 후 오락 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을 찾았다.

정자에 올라서면 말없이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동작구에서 조성한 ‘동작충효길’을 따라 걷는 것도 방법. 동작역부터 노량진역까지 4.7km에 ‘효(孝)’를 테마로 꾸며진 이 길은 용양봉저정, 조선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곳에 지어진 효사정(孝思亭) 등을 거친다. 코스 곳곳에 ‘효도전화 의자’도 설치됐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해 보라는 취지다. 용양봉저정은 지하철 9호선 노들역 2, 3번 출구에서 3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정조가 설치한 배다리 전담 관청인 주교사는 1882년 폐지됐다. 1894년을 끝으로 배다리도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지금도 경기 양평군에 가면 배다리를 만나 볼 수 있다. 양평군은 지난해 8월에는 두물머리와 세미원 사이 245m 구간에 52척의 목선으로 조선 정조시대 배다리를 재현해 설치했다. 배다리를 설계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에서 가까운 곳이다. 전철 중앙선 양수역에서 내려 700m가량 가면 닿을 수 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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