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문태준]벽화를 입은 옛 골목의 멋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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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계단, 녹슨 대문, 빈 집… 고단한 삶의 흔적 덕지덕지… 한산하던 달동네 골목들
고래, 토끼, 새 노닐고 꽃 피는 화려한 생명의 골목으로
가을이란 이름의 여인, 그곳에서 문득 만나게 될지도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박용래 시인은 시 ‘가을의 노래’에서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뿐이로다”라고 써서 가을이 내려온 밤의 정취를 노래했다. 실로 요 며칠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 음조가 애잔하다. 가을이 망설임도 없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무엇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정지용은 바람을 “음악의 호수”라고 했고, 또 “좋은 알리움”이라고도 했다. 바람을 좋은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 징조로 보았다. 시원하고 서늘해진 바람이 내일의 좋은 예감을 알려줄 법한 이 즈음은 걷기에도 좋다. 들길도 산길도 좋다. 들판은 익어가고 숲의 그늘은 식어가고 있다. 열매가 익어가는 때에 삶의 속도를 늦춰 걸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분명 이득이 많을 것이다. ‘손자병법’에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움직임이 없이”라는 구절이 있다. 인생이 병법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숲과 산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을 터이니 이 가을에는 한적(閑寂)과 적정(寂靜)을 택해 살면 어떨까 한다.

걷는 일을 즐기게 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요즘 나는 짬이 날 때에 도심 속 옛 골목을 찾아 걷고 있다. 가파른 계단과 구불구불하고 좁다란 길을 따라 걷는다. 골목의 끝까지 갔다가 막히면 되돌아 나와 다른 골목으로 간다. 대개는 언덕배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낮은 담장과 창, 보자기만 한 볕이 드는 양지, 녹슨 대문, 작은 화분, 텃밭, 흘깃거리는 고양이,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골목은 조용하고 한산하다. 살던 이들이 떠난 빈집도 더러 보게 된다. 곳곳에 삶의 고단한 흔적들이요, 곳곳에 옛 시간들이 쌓여 있다. 그러나 어떤 골목은 굴렁쇠를 굴리고, 자치기를 하고, 땅뺏기와 공깃돌 놀이, 말뚝박기에 빠진 아이들이 골목에서 벌떼처럼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을 안겨주는 골목은 편안하다. 아마도 이러한 골목은 내 살던 고향의 어릴 적 골목을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한 시인이 쓴 시를 읽다 일본에 ‘잇포니호(一步二步)’라는 아이들의 놀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놀이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눈으로 뒤덮였던 겨울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 골목이 오랜만에 마른 땅이 되면 아이들은 숨이 차도록 길을 뛰어다니는데 이 엄청나게 단순한 놀이가 ‘잇포니호’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놀이에는 아이들의 순수한 희열과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호기심이 가득 들어있다. 골목을 독차지한 악동들의 맑은 행렬을 다시 오늘에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반갑겠는가.

요즘 찾아가 본 골목들은 의상(衣裳)이 많이 바뀌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골목이 벽화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옛 골목에 그림을 그려 넣고, 조형물을 설치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벽화 골목이 생겨나고 있다. 벽화 골목이 1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아졌다고도 한다. 통영시 통영어시장 뒤편 동피랑 마을은 꽤 이름이 났다. 고래와 바다, 새, 꽃, 기린, 만화 캐릭터 등이 달동네 담벼락에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몰려드는 인파 덕에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커피 가게도 생겼다. 골목의 끝에서는 멀리 통영항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백석의 시 ‘남행시초(南行詩抄)2-통영(統營)’을 동피랑에서 만났던 기억이 새롭다. “통영 장 낫대들었다//갓 한 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단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아 들고//화륜선 만져 보려 선창 갔다//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열이레 달이 올라서/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라고 쓴 시였다.

수원시 지동 벽화 골목도 들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여행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이 골목에 들러 나의 졸시 ‘일가(一家)’의 시구인 “너도 나도/더는 갈 곳 없어/더는 갈 곳 없이/서로에게/받힌 돌처럼 앉아서”를 직접 써넣은 일은 행운이었다.

최근에는 춘천시 효자동 골목을 찾아갔다. 효자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반희언이라는 인물의 지극한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반희언의 효심을 알게 된 선조가 효자정려를 내린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도 벽화가 들어서고 있었다. 익살스러운 새끼 호랑이, 뱀과 토끼와 당나귀와 나비 등이 그려져 있었고, 폐품을 활용한 정크로봇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벽화 골목이 길지는 않았지만 94세 할머니가 하는 옷수선집, 나무전봇대, 아기자기한 돌담, 담 작은 도서관 등 춘천의 명물들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주민들이 직접 밥집을 운영하는 마을기업으로 거듭날 계획이라고도 했다.

일본 시인 쓰무라 노부오(津村信夫)는 시 ‘가을의 노래’에서 이렇게 썼다. “난 기억하네./억새풀을 손에 든 아낙네가, 마치 초상화처럼 서 있던 그 집 입구, 또는 그 오후를.”

옛 골목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가을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문득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태준 시인
#박용래 시인#가을의 노래#골목#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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