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김영란법’ 강화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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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내 아이의 학교 담임선생이 돈을 밝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자. 보아 하니 다른 학부모들은 담임에게 봉투를 갖다 바치는 눈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바쳐야 하나, 아니면 나만이라도 삼가야 하나? 그도 아니면 용감하게 고발해야 하나?

고발하는 게 정의로워 보이지만 혹시라도 내 아이가 당할 불이익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봉투를 바쳐 내 아이의 피해를 막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다. 남들이 봉투를 바칠 때는 나 역시 바치는 게 ‘합리적’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부패 균형’의 상태다. 사회적으로 큰 낭비와 비효율이 발생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1995년부터 매년 말 국가별 반(反)부패 순위를 매겨 왔다. 그간 40위권을 맴돌던 우리나라의 순위는 최근 2년 연속 하락하더니 작년 말에는 45위까지 추락했다. ‘부패 균형’의 함정(陷穽)에 빠진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우리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창피하다. 하지만 더 큰 걱정은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경제선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반부패 선진국인 북구(北歐)나 싱가포르는 어떤 상태에 있을까? 남들이 봉투를 안 바치니 나도 안 바치는 ‘반부패 균형’ 상태다. 이 균형은 도달하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남들이 안 바칠 때 나만 바치면 효과 만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봉투의 유혹에 시달리는 선생이나 학부모들을 어떻게 제어해야 ‘반부패 균형’을 달성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시카고대 개리 베커 교수가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선생이 예상하는 기대(期待)처벌이 봉투의 가치를 능가하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기대처벌이란 적발될 확률에 처벌금액(형량)을 곱한 값이다. 예컨대, 10만 원을 받은 선생이 적발될 확률이 10%라면 벌금액은 10만 원의 10배인 100만 원은 넘어야 부패의 인센티브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보름 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부터 지속돼 온 잘못된 관행과 부정부패를 바로잡아 더이상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나라를 ‘반부패 균형’ 상태로 올려놓겠다는 약속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달 전 국무회의를 통과한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 수정안을 보면 그 약속의 진정성에 강한 의구심이 든다. 이 법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제안했다고 해 ‘김영란법’으로 불린다.

김영란법의 원안은 공무원이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으면 무조건 형사처벌을 받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수정안은 직무 관련성이 없는 경우엔 받은 돈의 2배 이상 5배 이하의 과태료만 내면 전과(前科) 없이 공무원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뇌물 받기 더 수월하도록 만든 측면이 있다.

이 수정안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박 대통령은 이달 6일 “공직윤리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제도 개선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청탁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청렴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존재라 엄정한 법집행과 제도가 선행되지 않으면 청렴한 문화를 만들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반부패 균형’을 원한다면 먼저 김영란법을 원안보다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형사처벌과 더불어 적발될 확률을 고려한 징벌적 배상금까지 물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베커 교수의 해결책이 작동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수정안으로 대통령을 오도(誤導)한 관련자들을 문책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말하는 청렴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조비리부터 우선적으로 척결해야 한다. 그래야 반부패 관련 법집행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벤츠 여검사’가 내연남인 변호사로부터 받은 벤츠 승용차와 명품 가방 등을 청탁의 대가가 아닌 ‘사랑의 정표’로 해석해 무죄를 선고하는 현실에서 법집행의 정당성을 믿을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연남과의 ‘사랑’이야 법이 관여할 바 아니지만 ‘사랑의 정표’는 유죄가 되도록 김영란법을 강화해야 한다.

검사 출신인 강지원 변호사는 김영란 전 위원장의 남편이자 방송인으로 유명하다. 강 변호사는 아내가 대법관으로 근무하던 6년간 28건의 대법원 사건을 수임했다고 한다. 부부 법조인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배우자가 담당한 재판부의 사건이 아니라면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의 상식으로 볼 때 이 역시 법집행의 정당성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김영란법을 강화할 때 이런 형태의 수임 역시 금지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의 김영란법 수정안으론 ‘부패 균형’의 함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 경제선진화를 달성하려면 김영란법을 원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부정부패를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실천해주기를 바란다.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김영란법#부패#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금품#부패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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