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1인자의 적들’ 어디로 갔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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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라이 재판으로 본 中권력투쟁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시 서기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절대 권력에 대한 도전과 숙청이 반복돼 온 현대 중국의 권력 투쟁사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1954년 ‘가오강(高崗) 사건’은 사회주의 건국 이후 첫 당내 권력 투쟁으로 꼽힌다. 가오강은 공산당이 1941년 중앙 서북국을 조직할 때 서기를 지냈다. ‘동북왕’이라 불릴 정도로 세를 과시했다. 한때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도 거론됐다. 하지만 자신의 공로를 지나치게 앞세우면서 당내 2인자였던 류사오치(劉少奇)와 갈등을 빚었다. 지방 권력을 쥐고 있던 데다 ‘소련파’라는 점도 스탈린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마오쩌둥의 견제를 불러온 요인이었다. 결국 반당(反黨) 혐의로 1954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자살했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철학이 달랐다. 1962년 중앙과 지방의 지도간부 7000명이 참석한 회의(7000인 회의)에서 대약진운동 이후 발생한 대기근에 대해 “3할은 천재(天災)이고 7할은 인재(人災)”라며 마오쩌둥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1966년 문화혁명이 터지자 ‘반(反)마오쩌둥파의 수령’으로 불리며 비판을 받았으며 1969년 모든 공직이 박탈됐다. 6·25전쟁 때 중공군 사령관을 지낸 펑더화이(彭德懷)도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 숙청당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그의 1인 지배에 저항하던 혁명 영웅들이 제거됐다면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는 보수파와 개혁파 간 대립이 숙청으로 이어졌다.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은 1986년 학생 민주화 시위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에 동정적 견해를 보이다 리펑(李鵬) 전 총리 등의 공격을 받았으며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경제 분야에서는 개혁적이었지만 정치에서는 보수적이었다.

장쩌민(江澤民) 시대부터는 권력싸움의 형식이 달라진다. 부패 등의 혐의로 상대방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천시퉁(陳希同) 전 베이징 시 서기는 상하이방(상하이 출신 관료 그룹)의 좌장인 장쩌민과 맞서다 1995년 부패혐의로 해임됐다. 당시 장쩌민은 베이징 간부 40여 명을 함께 축출해 ‘베이징방’의 뿌리를 뽑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하이방의 선두주자였던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시 서기도 후진타오(胡錦濤)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하다 2006년 사회보장기금 비리에 연루돼 해임됐다. 그는 장쩌민의 권세를 믿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앞에서 책상을 내리치며 큰소리를 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보시라이#류사오치#마오쩌둥#장쩌민#원자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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