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없는 구린 인생살이에 통쾌한 돌직구 날렸지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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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상 휩쓸었던 뮤지컬 ‘애비뉴Q’ 주역 칼리 앤더슨

꼭두각시 인형들을 앞세운 뮤지컬 ‘애비뉴Q’에서 두 메인 여성캐릭터 ‘케이트 몬스터’(왼쪽)와 ‘루시’ 역을 맡은 칼리 앤더슨. 순진한 이상주의자와 색정적인 탕녀의 목소리를 야누스처럼 수없이 바꿔가며 들려준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꼭두각시 인형들을 앞세운 뮤지컬 ‘애비뉴Q’에서 두 메인 여성캐릭터 ‘케이트 몬스터’(왼쪽)와 ‘루시’ 역을 맡은 칼리 앤더슨. 순진한 이상주의자와 색정적인 탕녀의 목소리를 야누스처럼 수없이 바꿔가며 들려준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내 인생 엿 같아(It sucks to be me). 돈도 없고 직장도 없는데 이제 벌써 서른세 살. 너무 구린 내 인생. 이게 진짜 인생이야.”

금지된 사랑에 빠진 공주나 가면을 뒤집어쓴 섹시한 귀족 의적은 없다. 뮤지컬 ‘애비뉴Q’의 주역은 청년실업자, 유치원 보조교사, 실패한 코미디언 지망생, 고객 없는 심리상담사, 삼류 클럽가수다. 미국 뉴욕 중심가로부터 알파벳 순서로 17번째 떨어진 변두리 애비뉴Q가 그들의 공간이다.

무대에 오르는 건 TV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꼭두각시 인형들. 30대가 된 이 인형들은 TV에서처럼 흥겹게 햇빛 찬란한 세상을 노래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뻔한 일상. 네가 누군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무겁거나 어둡지 않다. “인터넷은 포르노를 위해 존재한다”는 위악을 떨면서도 귀여운 농담과 불쾌한 음담패설의 경계를 영리하게 지켜낸다. “게이라서 힘들지? 힘들게 대학 졸업했는데 사회 나와 보니 아무 쓸모 없지? 그래도 일단 살아 봐. 집 밖에 진짜 인생이 있어.” 귓전에 남는 것은 질척거림 없이 깔끔하고 유쾌한 위로의 말들이다.

두 메인 여성캐릭터 인형을 맡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배우 칼리 앤더슨(23)은 야담과 독설이 가득한 무대에서 칙칙한 분위기를 부지런히 걷어내는 주역이다. “어린 몬스터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게 꿈”이라고 순진한 열변을 토하는 털북숭이 유치원교사 ‘케이트 몬스터’와 온종일 남자와 섹스할 궁리만 하는 음탕한 클럽가수 ‘루시’ 역. 앤더슨은 목소리와 몸짓의 뉘앙스를 변검(變검)하듯 순식간에 바꿔가면서 양극단의 캐릭터를 130분간 넘나든다. 고작 4주 훈련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형 다루는 솜씨도 능수능란하다.

27일 오후 서울 잠실동 샤롯데씨어터에서 마주 앉은 그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뜸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 당신에 더 가깝나. 외모는 순수한 케이트 쪽이지만 촉촉한 목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속내는 루시 닮지 않았을까’ 싶던데….

“루시 쪽이라고 답해야 당신이 기뻐하겠지. 나는 케이트에 가까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연을 본 친구들이 ‘너 루시 같을 때가 많다’고 하더라. 그 얘길 듣고 곰곰 생각해 보니 어쩐지 루시를 연기할 때가 더 쉬웠다. 모르겠다. 이상주의자 케이트처럼 살고 싶지만 내 어깨 위의 악마가 나를 자꾸 루시 쪽으로 이끄는 것일지도.”

―스물세 살. 정말 부러운 나이다. 나이 드는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려 한다. 미래에 대해 많이 계획하지 않는다. 물론 곧 결혼하고 애도 낳겠지. 눈가에 주름이 많아지겠지만 미래가 무엇을 쥐고 나를 기다릴지 기대된다. 나이 먹는 거, 두렵지 않다.”

―역시 젊다. ‘애비뉴Q’의 인형들은 ‘내일이 와도 태양이 뜨지 않을 수 있다’ ‘삶이 괴로우면 술이나 마셔’라고 노래한다. 그런 비아냥거림, 살아온 햇수와 경험에 비추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나.

“내 인생은 아직 ‘엿’ 같지 않다. 당신 말대로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뮤지컬 속 캐릭터처럼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고민하는 친구가 있었다. 1부 삽입곡 ‘모두가 조금쯤은 인종차별주의자’를 이해할 만큼은 인종차별과 관련한 경험을 해봤다. 섹스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다.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차여 본 적도 당연히 있다. 누구나 원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꿈을 놓아버릴 때가 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평범한 이야기다.”

―2004년 토니상 최고작품상, 음악상, 극본상을 휩쓸었다. 내용을 구상하고 노래를 만든 로버트 로페즈와 제프 막스는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고 했다. ‘인생 고달프다’는 주제에 뜨겁게 공감하는 대중. 어째 좀 서글프지 않나.

“이 뮤지컬은 판타지가 아니다. 현실에 뿌리를 둬 성공한 작품이다. 일반적인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뮤지컬이랄까. 매일 반복되는 우리 일상에 대한 살짝 껄끄러우면서도 즐거운 농담이다. ‘네 불행은 내 행복’이라든가 ‘대학 나오면 뭐 하니’처럼 평소 공감하면서도 펼쳐놓고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시원하게 쏟아낸다. 나는 (관객으로) 벌써 세 번 봤다. 볼 때마다 새롭다. 앞으로 30번은 더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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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비긴스 연출, 니컬러스 덩컨, 크리스토퍼 래그랜드 출연. 10월 6일까지. 5만∼13만 원. 1577-3363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애비뉴Q#칼리 앤더슨#세서미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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