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경준]대한민국호(號) 구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정경준 산업부 차장
정경준 산업부 차장
모리셔스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다. 제주도보다 조금 넓은 땅에 약 130만 명이 모여 산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 이래 프랑스,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968년 독립할 당시 모리셔스는 설탕 수출로 먹고사는 빈국(貧國)이었다. 경작지의 90%에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전체 수출의 96%를 설탕이 책임졌다. 이 나라는 한때 값싼 노동력을 토대로 섬유의류 가공무역에 주력하며 눈부시게 성장해 ‘아프리카판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73년부터 1999년 사이 연평균 5.9%에 이르던 실질 경제성장률은 2000년대 들어 2%대로 추락했다. 섬유의류 산업의 몰락이 원인이었다. 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인건비가 치솟았다. 방글라데시와 베트남 등은 저임금 공세를 폈다. 결국 저임금을 무기로 하던 모리셔스의 섬유의류 산업은 경쟁력을 잃었다.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노동집약적 산업을 발판으로 일어선 국가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겪는다. 웬만한 나라는 주저앉아 개발도상국에 머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달랐다. 정부의 체계적인 경제개발계획도 큰 힘이 됐지만 기업들의 비상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초일류기업이 됐지만 삼성전자의 제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가전매장에서 소비자의 발길이 뜸한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열돼 있는 신세였다. 세탁기를 조립하다가 뚜껑이 안 맞으면 즉석에서 칼로 깎아 맞추는 직원도 있었다. 참다못한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삼성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불량이 나오면 작업자 누구라도 생산라인을 멈추게 했고, 불량품 화형식을 거행하는 등 충격요법을 동원하며 품질 제일주의를 강조했다.

1990년대만 해도 현대자동차는 북미 시장에서 ‘싼 맛에 타는 차’로 통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탈바꿈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품질 경영을 독려한 결과다. 그는 공격적인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나서 5대양 6대주에 걸친 해외 생산망을 완성했다.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1등’을 강조했다. 2005년에는 시장 선도기업으로 가는 길, 즉 ‘LG 웨이(Way)’를 비전으로 제시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한’ LG로 거듭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탁월한 성과를 낸 연구개발(R&D) 인력은 임원급 연구위원, 전문위원으로 발탁해 파격적으로 대우한다.

이런 열정과 피땀을 흘린 결과 세 그룹은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에 총 7개 계열사의 이름을 올렸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포천 500대 기업에 한 곳이 새로 들어가면 나라 전체의 1인당 소득이 0.3%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대기업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핵심 변수라는 것이다.

2013년 포천 500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 기업은 14개다. 2011년부터 3년째 13, 14개에서 제자리걸음이다. 올해 2분기(4∼6월) 가까스로 1%대(1.1%) 성장률을 회복하긴 했지만 한국경제가 0%대 분기 성장에 머물며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도 공교롭게 2011년 2분기부터다.

문제는 경쟁국들은 날고, 뛰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추격연구소는 최근 경제 선진국들을 얼마나 따라잡았는지(추격지수), 얼마나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는지(추격속도지수)를 수치화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한국의 추격지수는 주요 100개국 중 26위, 추격속도지수는 56위에 그쳤다. 이런 추세라면 격차가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건희, 정몽구, 구본무 등 10대 그룹 총수들이 28일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투자 계획을 밝히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대한민국호(號)가 ‘원조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불리느냐, ‘선진국 문턱의 함정’에 빠지느냐는 여기서 결정될 수도 있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