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조동주]해외공관 ‘관노비’의 눈물, 외교부가 닦아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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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주 사회부 기자
조동주 사회부 기자
“외교부 감사요? 선후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중남미의 한 한국대사관저 요리사 A 씨가 26일 기자에게 보내온 e메일에는 외교부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A 씨는 “감사 직원들도 어차피 나중에 대사로 나갈 사람들이라 서로 현실을 알면서도 적당히 넘어간다더라”며 “건강이 좋았던 나도 3개월 만에 영양실조와 급성빈혈에 시달릴 만큼 현지 요리사 사정은 정말 열악하지만 차마 (이를 알릴) 용기를 못 냈다”고 적었다.

본보가 해외공관 요리사의 인권유린에 대해 보도한 직후 외교부는 문제가 불거진 해외공관에 대해 철저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해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기자가 접촉한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회의적인 분위기이다. 여론이 잠잠해지면 곧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는 탄식이 대다수였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상당수 요리사들은 혹시나 ‘갑’인 외교부와 대사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입을 열기를 꺼렸다. 한 요리사는 기자에게 “기사 한 번 쓰고 말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라.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든다”며 기사화를 만류하기도 했다.

본보 보도 이후 세계 각국 공관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는 요리사들의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아프리카의 한 대사관저에서 일한 요리사 B 씨는 대사 부인에게서 “엄마를 보면 딸을 아는데, 널 보니 네 딸이 어떤지 알겠다”는 폭언까지 들었다고 한다. B 씨는 주 7일 근무에 시달리다 결국 8개월 만에 몸이 망가져 중도 귀국해야 했다.

모든 국가가 우리나라처럼 해외공관장에게 자국인 전용요리사를 지원하는 건 아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과 알제리대사관은 한국에서 뽑은 한국인 요리사가 관저 요리를 책임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가 모든 해외공관장에게 한국인 전용요리사를 보내주는 건 만찬을 통해 한식을 현지에 소개하는 것도 외교 수단 중 하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부 행정직원 신분으로 관용여권을 들고 출국하는 해외대사관저 요리사 중 일부는 사실상 대사 가족의 개인 가정부로 일해 온 게 현실이다.

물론 모든 해외대사관저 요리사가 ‘관노비’ 취급을 받은 건 아니다. 지난해 8월부터 올 3월까지 과테말라 한국대사관저 요리사로 일했던 김용진 씨(30)는 “정말 대사님한테 따스한 대우를 받았다. 대사님이 직접 차를 운전해 주변 지리를 소개해 줬고 내가 외로워할까 봐 관광지에도 데려가 줬다. 과테말라에서의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감시 사각지대에 근무하는 고위공직자가 특권의식을 갖고 공사 구분을 못할 경우 어떤 추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번 파문은 보여줬다. 감시의 눈을 강화하고 특권을 줄이는 제도적 개선이 요구된다.

조동주 사회부 기자 djc@donga.com
#관노비#해외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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