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기관 ‘입찰 스펙’… 中企엔 ‘통곡의 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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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울리는 공공조달시장 문턱
“단체점퍼 공급 원하면 백화점 10곳 납품실적 내라”

카지노 ‘세븐럭’을 운영하는 그랜드코리아레저(GKL)는 임직원들에게 나눠 줄 아웃도어 점퍼 7억3800만 원어치(1663벌)를 구입하려고 지난해 6월 공공조달 전자상거래 웹사이트 ‘나라장터’ 입찰에 부쳤지만 무산됐다. 중소기업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품목인 점퍼의 납품 자격을 ‘백화점 10곳 이상에 납품하는 브랜드’로 제한한 결과 한 업체만 입찰서류를 냈기 때문이다. 재입찰에는 두 업체가 참여했지만 품평회를 통과하지 못해 또 무산됐다. 한국관광공사의 자회사인 GKL은 ‘기타 공공기관’으로 분류된다.

결국 GKL은 지난해 8월 ‘백화점 10곳 납품’ 조건을 없애고 대기업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중소기업 품목이라도 유찰되면 대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도 ‘단일 건으로 1600벌 이상 아웃도어 점퍼를 납품한 적이 있는 업체’라는 조건을 붙였다. 중소기업 3곳과 네파, K2, 블랙야크 등이 경쟁한 끝에 결국 현대백화점그룹의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계열사인 현대H&S가 선정됐다.

공공조달 시장에서 공공기관들이 까다로운 ‘스펙’을 요구하며 중소기업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납품업체의 과거 실적이나 신용등급, 매출 등에 높은 배점을 둬 중소기업을 배제하는 사례가 많다. 조달청 고시에 따르면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 국공립학교, 교육청 등은 구매 금액이 일정 규모 이상이면 반드시 조달청을 통해야 한다. 하지만 공기업, 준정부기관, 기타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은 자체 계약할 수 있다. 지난해 전체 공공조달 시장 106조4000억 원 중 직접 조달 비중은 67.8%나 됐다.

국내 조사업체 A사는 4월 공기업인 한국마사회가 나라장터에 올린 1억1960만 원짜리 ‘2013 통합서비스품질평가 설문조사’ 입찰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안서를 내지 못하고 포기했다. 첫 번째 걸림돌은 ‘유사 용역’ 실적이었다. 계약금액 5000만 원 이상인 서비스 만족도 조사를 얼마나 많이 해 봤느냐에 20점 만점을 줘 경험이 적은 A사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매출액에도 25점을 배점했다.

마사회는 조사업체의 신용등급에 따라서도 점수차를 많이 냈다. 최고 등급인 ‘AAA’에는 25점을 준 반면 ‘BBB―’ 등급은 11점만 부여했다. 조달청이 ‘A―’ 등급 이상에 만점을 주고 ‘BBB―’ 등급까지는 단계마다 0.2점씩 감점해 중소기업이 신용등급 때문에 입찰에서 떨어지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것과 딴판이다. A사 대표는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입찰 참여 기회마저 박탈당하니 억울하다”며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만 좋은 꼴”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 납품문턱 높여 中企배제… “대기업-외국계만 덕봐” ▼

공기업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6월 8억5360만 원 상당의 실내 조명기구 납품 건을 공고하면서 입찰 조건으로 ‘3년 이내에 단일 계약으로 8억5360만 원 이상 납품한 적 있는 업체’를 내걸었다. 중소기업 B사 대표는 “중소기업이 계약 규모를 점차 늘려 가며 성장하도록 돕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높은 문턱을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기획재정부가 경제교육 주관 기관으로 지정한 한국경제교육협회는 5월 조사 용역을 맡기면서 ‘국내 4년제 대학 경제영역 부교수 이상’을 연구책임자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관련 업계는 “대학 연구실이나 대학 산학협력단만 참여하라는 뜻”이라며 “특정 집단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처럼 구매 담당자들이 외형과 실적을 중시하는 배경에는 행정 편의주의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기업 규모, 신용등급 등 눈에 보이는 잣대에 과도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품질 평가를 통과한 제품에 대해서는 구매 담당자 면책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기업계는 공공조달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춰 중소기업이 이를 ‘성장 사다리’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소기업이 공공조달 시장에서 번 돈을 재투자해 경쟁력을 높이고 중견기업으로 커 갈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김문겸 중소기업 옴부즈맨은 “공공조달 시장에서 중소기업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려면 조달청 또는 제3의 기관이 입찰 조건이나 낙찰자 선정 방식 등이 합리적인지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세븐럭#카지노#공공조달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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