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미경]인종차별과 ‘두 도서관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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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최근 ‘재미 삼아’ 호주 출신 유학생을 총격 살해한 10대 청소년 3명이 미국을 경악시켰다. 청소년의 무너진 윤리의식에 공분하던 이 사건의 방향이 인종 문제로 번지는 양상이다. 살인을 저지른 흑인 청소년이 “백인이 밉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자주 날린 것으로 밝혀지면서부터다. 보수적인 백인층에서는 “왜 백인이 흑인을 살해하면 국가적 뉴스가 되고, 흑인이 백인을 살해하면 평범한 살인 사건으로 취급받느냐”며 “이번 사건을 인종혐오 범죄로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인종 역차별’ 주장이다.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을 살해한 백인 조지 지머먼 무죄 평결에 한바탕 들고일어났던 흑인 사회가 이번에는 잠잠한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미 수사당국은 “인종적 동기는 없다”고 선을 그으며 이번 사건이 인종 문제로 번질까 봐 우려하고 있다. 지머먼 평결 이후 미국의 인종 ‘온도계’가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미국에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인종 대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워싱턴 인근 기자가 사는 집 부근에 도서관이 두 곳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립도서관들이다. 요즘 이 도서관들이 인종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다.

도서관 두 곳은 자동차로 5분도 안 걸릴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그러나 분위기는 천양지차다. 한 도서관은 백인 이용자가 90% 이상이다. 다른 도서관은 흑인과 히스패닉계 주민이 압도적으로 많이 이용한다.

백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도서관은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새로 지어진 도서관은 널찍한 내부 공간에 푹신한 소파에 시설도 최첨단이다. 저자 강연회가 자주 열리고 주말에는 도서관 야외에서 음악회가 펼쳐진다. 도서관 앞에는 고급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늘어섰다.

반면 흑인들이 주로 찾는 도서관은 30여 년 전에 지어졌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도서 분류 시스템도 구식이다. 컴퓨터가 부족해 이용자들 사이에 언제나 경쟁이 치열하다. 도서관 앞에는 고급 레스토랑 대신 맥도널드가 있다.

그런데 최근 흑인들이 번잡한 자기 지역 도서관을 벗어나 백인이 주로 이용하는 도서관을 찾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백인 지역 도서관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벽에는 ‘뛰지 말라’ ‘실내 정숙’ 등 주의문이 붙었다. 공공 집기는 분실을 막기 위해 끈으로 묶어뒀다. 결정적 논란은 무제한이던 컴퓨터 이용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하면서 벌어졌다.

흑인 이용자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흑인 이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인종차별적이라는 주장이다. 도서관의 다른 질서 유지 조치들도 흑인을 겨냥한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 사용 제한은 최근 주민자치 토론회에서 격론이 벌어질 정도로 ‘핫이슈’가 됐다.

최근 이 도서관에서 만난 흑인 대학원생 재스민 씨(25)는 도서관의 조치들에 대해 “인종 모욕적”이라고 비난했다. 흑인 학생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줄 뿐 아니라 학습의욕도 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흑인 가정의 학생들은 집에 컴퓨터가 없어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다. 도서관 측은 “인종차별적 의도는 전혀 없으며 도서관 이용자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흑인 저명 사회운동가 코넬 웨스트 전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인은 백인이건 흑인이건 좋건 싫건 인종 문제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숙명”이라고 말했다. 50년 전 8월 28일은 수많은 미국인이 워싱턴에 운집해 인종 화합을 염원한 ‘워싱턴 평화대행진’이 열린 날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이 자리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8일 바로 그 자리에서 인종 화합 연설을 할 예정이다. 수많은 미국인이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것이다. 두 도서관에 다니는 흑인도 백인도 참석해 인종 화합을 염원할 것이다. ‘두 도서관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하다.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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