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하늘이 두 쪽 나는 무상보육은 못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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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도 변하게 한 20년… 워킹맘 육아투쟁은 그대로
어린이집 대기자만 더 늘어
정부 신뢰 없는 나라에서 포퓰리즘 보편복지는 세금 낭비
오도 가도 못하는 애물단지 세종시 꼴 날라

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지금도 생생하다. 출근해야 할 시간인데 아이를 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지 않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우유병과 기저귀를 챙겨놓고 동동거리는데 아주머니가 “간신히 공중전화를 찾았다”며 숨차게 전화를 해왔다. 서울 영등포 로터리에서 버스가 물에 잠겨 걸어가고 있으니 옆집에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라는 거다. 평소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던 옆집 문을 두드려 “우리 아줌마가 지금 오는 중인데요…” 사정을 하는데 목이 메었다.

어린이집을 알아보지 않았을 리 없다. 만 두 살쯤 안 되면 받아주는 곳이 없고, 두 살을 넘긴 뒤엔 마포구에서 가장 믿음직한 구립 시설은 대기자가 한없이 밀려 있었다. 시멘트 바닥 위에 장판을 깔고 아이들을 앉혀놓은 아파트 앞 상가의 어린이집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육아 투쟁 속에 자란 딸이 지금 취준생(취업준비생)이다. 빠른 세월보다 놀라운 건 군대도 변하게 한 20년 세월 동안 육아 현실은 손톱만큼도 안 변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공약인 0∼5세 무상보육이 취업 여성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점은 경악스럽다.

어차피 ‘공짜 보육’이 됐다. 전업주부들은 “어린이집 안 보내면 손해”라며, 어린이집에선 “전업주부는 아이들을 일찍 데려간다”며 서로 좋아하는 바람에 취업 주부는 아이와 함께 왕따가 되고 있다. 일하는 엄마들 사이에선 “워킹맘들은 차라리 무상보육 폐지를 원한다”는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다.

지금 서울 시내에선 “하늘이 두 쪽 나도! 무상보육은 계속되어야 합니다”라는 광고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 광고도 아닌 척 정류장 안내방송 속에 섞여 나와 은근히 세뇌당할 것 같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선 공약을 지키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을 부각하면서 자신은 무상보육을 포기하지 않는 착한 시장임을 알리려는 듯하다.

그렇게 중요한 정책이라면 증세를 하거나 나랏빚을 내서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일하는 엄마들이 진정 원하는 건 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좋은 어린이집이지, 무상보육이 아니다. ‘서울형 어린이집’의 42%가 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새누리당의 지적이다. ‘시설에 보내면 공짜’라는 정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20여 년 전처럼 지금도 마음 놓고 보낼 시설이 없다면.

대통령이 무상보육 약속을 하기 전, 민주당이 2011년 ‘3+1(무상의료 무상급식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정책) 시리즈’를 내놓을 때, 2010년 당시 노회찬 민노당 서울시장 후보자가 무상보육 정책을 야심 차게 내놓을 때 ‘보편복지’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웠어도 호응을 얻었을지 궁금하다. 세금으로 사회서비스를 국민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급하는 보편복지란 단순한 복지 확대라고 할 수 없다. 사민주의적 체제로 가자는 거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과 맞는다면 반대하지 않겠다. 하지만 무상보육은 이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고용률 높이기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 결과 확인됐다. 보편복지론자들이 떠받드는 스웨덴에서도 우리처럼 취업모와 미취업모에게 똑같은 보육 서비스를 하진 않는다. 양육수당을 도입한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 한두 살짜리 아기를 둔 엄마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떨어졌다는 연구가 있다.

취약계층에 주는 양육수당이 되레 양극화를 키울 수 있다는 KDI의 또다른 연구는 섬뜩하다. 저소득층 아이들이 제 힘으로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드림스타트(빈곤아동가구 통합지원) 같은 최상의 교육환경을 확대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한 달 20만 원 현금이 아쉬운 취약계층에선 아이의 어린이집을 끊는다는 거다. 이 때문에 유아기 인지 언어 사회적 발달이 더뎌지고 가난이 대물림된다면 양육수당이 아니라 독이다.

국정과제에 부합하지도 않고, 취업 주부도 취약계층도 행복하지 못한 무상보육의 문제점이 불거졌는데도 이 정부의 누구 하나 “개선해야 한다”고 나서지 않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다. 정부는 복지 누수 감시에 힘쓴다지만 잘못된 복지 설계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자칫하면 오도 가도 못하는 세종시처럼 애물단지 정책이 될 수 있다.

정부에 대한 신뢰 없이 복지국가는 성공하기 어렵다. 가장 소중한 내 아이 보육정책에서부터 공공부문의 책무성과 정책 능력, 공적 지출의 투명성을 보여줘야 “세금 더 낼 테니 복지 늘리자”는 국민도 늘어난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KDI 원장 시절 내놓은 성장과 사회발전에 관한 보고서는 “비효율적 복지제도가 성장잠재력을 저해한다”고 했다. 대통령 약속이라고 무상보육에 손끝 하나 못 댔다가 그리스나 이탈리아같이 정말로 하늘이 두 쪽 날까 겁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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