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커피에 놋쇠잔까지… 日커피숍 “단카이세대 모셔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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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시니어가 온다]<2>일본 - 시니어 중심의 생산과 소비

“아이스 구로미쓰 밀크코히 오네가이시마스(아이스 흑설탕 커피 주세요).”

지난달 초 일본 도쿄 아카사카의 ‘우에시마(上島) 커피점’. 오전 11시경 이곳을 찾은 야마모토 다로(山本太郞) 씨(60)는 메뉴판을 들고 찾아온 점원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이 커피숍은 원래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지만 노인 고객의 주문은 자리를 찾아가 받는 ‘풀 서비스’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메뉴판에는 ‘두유 밀크 커피’ ‘들깨 커피’ 등 여느 커피전문점에 없는 메뉴가 여럿 적혀 있었다. 5분 후 점원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놋쇠 잔에 담긴 커피를 가지고 왔다. 30석 정도 되는 이 커피숍에는 야마모토 씨처럼 나이 지긋한 손님이 절반 이상이었다.

○ 시니어 산업 ‘100조 엔’ 시대의 일본

중장년층을 겨냥한 커피 전문점 ‘우에시마 커피점’ 메뉴들. 이곳에선 옛날 찻집 분위기를 내기 위해 놋쇠 잔에 커피를 담는다.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중장년층을 겨냥한 커피 전문점 ‘우에시마 커피점’ 메뉴들. 이곳에선 옛날 찻집 분위기를 내기 위해 놋쇠 잔에 커피를 담는다.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우에시마 커피점은 중견기업인 UCC홀딩스㈜의 외식사업부 ‘UCC푸드서비스시스템스㈜’가 운영하는 커피 전문점이다. 일본 전역에 100여 개 매장이 있는 이 회사는 개점 초기부터 옛날식 찻집 커피문화에 익숙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들깨 커피, 생크림 커피 등 중장년들이 좋아하는 커피메뉴 개발은 물론이고 복고적 느낌이 나는 원목 의자와 탁자, ‘다이얼식 전화기’나 레코드판 같은 매장소품 비치 등을 통해 스타벅스, 도토루 같은 경쟁사와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이동통신 기기를 이용하는 중장년층을 위해 와이파이(Wi-Fi) 등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UCC푸드서비스시스템스㈜의 마쓰하시 데쓰(松橋徹) 사장은 “자녀를 다 키우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50대 이상 남성 시니어들을 겨냥했다”며 “지팡이보다 ‘태블릿PC’가 더 어울리는 ‘젊은 중년’을 동경하는 30, 40대 여성들도 매장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대표적 ‘저출산 고령화 국가’인 일본에서는 최근 ‘액티브 시니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부터 1953년 사이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단카이 세대·團塊世代)가 현업에서 물러난 것과 맞물린 현상으로 분석된다. 일본 국립사회보장 인구문제연구소는 현재 약 25.1%(3197만 명)인 일본 내 만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이 2020년에는 29.1%로, 2040년엔 36.0%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을 겨냥한 산업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의 경제 일간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일본 내 만 60세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산업의 시장규모가 100조 엔(약 1127조 원)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제 시니어 세대, 일본식으로 말하면 단카이 세대가 연금이나 타서 근근이 살아가거나 돌봄, 부양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소비시장을 형성한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 세대로 부상했다는 의미다.

유통업체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도쿄 최대 중심가인 신주쿠에 있는 게이오백화점 8층에는 시니어 전용 매장이 들어섰다. 99m²(약 30평) 공간에 의료기기부터 옷, 신발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한데 모아 판다. 게이오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의료기나 약 등이 인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혼자 살거나 여행을 즐기는 중장년들이 늘면서 등산화, 지팡이, 여행용 가방 등 활동성을 강조한 상품들이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 ‘두 번째 삶’을 꾸리는 일본 베이비붐 세대

요즘 액티브 시니어 세대는 적극적인 창업으로 인생 2막을 만들어 간다. 이들에게 창업 공간을 빌려주는 ‘세컨드라이프’의 가타기리 미오 사장(여·왼쪽)이 지난달 초 도쿄 긴자 본사에서 창업 설명을 하고 있다. 세컨드라이프 제공
요즘 액티브 시니어 세대는 적극적인 창업으로 인생 2막을 만들어 간다. 이들에게 창업 공간을 빌려주는 ‘세컨드라이프’의 가타기리 미오 사장(여·왼쪽)이 지난달 초 도쿄 긴자 본사에서 창업 설명을 하고 있다. 세컨드라이프 제공
최근에는 ‘60대 현역’들의 창업을 도와주는 창업 지원 센터들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올해 4월 일본 정부가 ‘65세 정년’을 의무화하는 법을 시행하면서부터 시니어산업이 더 활성화되고 있다.

3년 전 퇴직한 에모리 도루(江森徹) 씨(63)는 긴자세컨드라이프㈜가 만든 시니어전문 창업지원센터 ‘세컨드라이프’를 통해 ‘ET컨설팅’이란 1인 기업을 차렸다. 외국계 무역회사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 중소업체 대상 컨설팅업체를 차린 것. 그는 “회사 운영과 발표자료 작성 등을 모두 직접 해야 하지만 이 나이에 일하는 것에 만족할 뿐 아니라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세컨드라이프는 창업을 희망하는 중장년들에게 싼값에 사무 공간을 빌려준다. 창업 컨설턴트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며 창업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류회’도 수시로 연다. 이곳을 통해 창업했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중장년은 700여 명. 60, 70대가 많지만 미리 노후를 준비하려는 50대도 적지 않다. 이 회사의 가타기리 미오(片桐實央) 사장은 “컨설팅, 결혼상담 등 ‘연륜’이 필요한 사업 분야 창업이 주를 이룬다”며 “젊은 세대의 노동력이 부족한 일본 사회에서는 시니어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단카이 세대와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한국전쟁 이후인 1955∼1964년 태어난 약 900만 명)는 10년 정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현재 만 58세인 1955년생이 2년 후 예순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에도 조만간 ‘액티브 시니어 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코트라(KOTRA)의 정혁 일본지역본부장은 “한국도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앞두고 있는 만큼 두 번째 인생을 착실히 준비하는 일본 사회의 변화를 잘 살펴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액티브 시니어#일본#단카이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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