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씨는 정권이양 준비하라” YS, 직격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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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4>가처분신청

총재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정부와 여당에 항의하는 신민당 의원들이 전원 단상을 점거한 가운데 이를 홀로 바라보고 있는 YS의 모습. 1979년 10월 4일이다. 동아일보DB
총재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정부와 여당에 항의하는 신민당 의원들이 전원 단상을 점거한 가운데 이를 홀로 바라보고 있는 YS의 모습. 1979년 10월 4일이다. 동아일보DB
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체제가 이끄는 신민당과 박정희 정권은 정면 대결을 시작한다.

신민당 의원들이 마포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지 3일째 되던 79년 8월 13일 의외의 일이 터진다.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 당선은 무효라며 직무집행 가처분신청을 제출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원과 대의원 자격이 없는데도 전당대회에 참석해 투표했다며 자신들처럼 무자격 대의원들이 투표에 참가해 이루어진 YS의 총재 당선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누가 봐도 ‘정치 공작’의 냄새가 짙은 행위였다.

신민당은 발끈했다. “이 같은 작태가 과연 누구에 의한 것인지 국민은 알고 있다”며 18일 열린 당기위원회에서 가처분신청을 낸 3명을 해당(害黨) 행위자로 제명했다. 사건은 당내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5·30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와 맞붙었던 이철승계 사람들이 전당대회 결과가 무효라며 법원에 제소한 것이다.

그런데 ‘설마’했던 법원이 전격적으로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서 YS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서울민사지법이 9월 8일 가처분신청이 이유가 있다고 판결하면서 김 총재와 김 총재가 임명한 부총재단에 대해 직무집행 정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정당 대표가 법원의 결정으로 직무집행이 정지된 것은 정당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원은 아예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 직무대행자로 선임하기까지 했다. 사법부가 직접 나서서 야당 총재 대행자까지 선임한 것은 스스로 정권의 하수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추태라는 비난 여론이 드셌다.

신민당은 “민주주의와 사법부 독립의 마지막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다. 정치 재판에 승복하지 않겠다”며 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김 총재도 법원 판결 이틀 뒤인 9월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박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하며 정권 타도를 선언하는 성명을 낸다. 이 성명은 이후 YS의 행보에 뚜렷한 분기점을 긋는 유명한 성명이 된다. 그동안 정권에 비판적 메시지를 많이 발표하긴 했어도 ‘하야’를 공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음은 성명 내용 중 일부다.

“나는 지난 총선에서 1.1%를 이겨 신임을 얻은 야당의 총재로서, 또 그동안의 투쟁으로 국민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는 공당의 총재로서 민주 회복을 바라는 모든 계층의 국민의 힘을 집결하여 범국민적 항쟁을 할 것이며, 박 정권 타도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나는 박정희 씨의 하야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국립경찰을 폭도로 전락시켜 심야에 신민당사를 습격하여 잠자던 여공들을 강제로 끌어내다가 김경숙 양을 죽이고 현역 국회의원과 취재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는데도 국민 앞에 사과 한마디 없고 폭력경찰을 한 사람도 잡아내지 않는 불법 무법 정권이 박 정권임을 다시 한 번 지적한다.”

이어 국민에게도 “깨어 일어날 것”을 주문한다.

“국민들은 1인 체제하에서 18년을 살기에도 지쳤는데 일당 독재하에서 살기를 강요당하는 오늘의 중대한 국면에 처해서도 궐기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명 발표 후 이뤄진 기자회견에서는 아예 4·19혁명을 거론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나는 이 땅에 다시는 4·19와 같은 비극적인 사태가 없어야 되며, 정치 보복 없는 사회가 뿌리박아야 된다는 차원에서 박 대통령 스스로 평화적인 정권이양 준비를 갖추라고 거듭 권고한다.”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 4·19혁명 같은 유혈사태가 날지 모른다는 초강수 경고였다.

정부 여당 역시 김 총재의 날 선 공격에 격앙됐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장관은 같은 날 아예 법원 결정을 기정사실화하며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이 시간부터 총재가 아니므로 의원으로 호칭한다. 정부는 김영삼 씨 발언을 지금부터 신민당의 전체 의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언명했다. 당이 도맡았던 대야(對野) 성명을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다는 것은 그만큼 박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읽혔다.

여야의 칼날 대치로 정국 긴장은 최고조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서서히 학생들을 비롯해 종교계도 들고 일어났다. 김 총재가 기자회견을 한 날 서울대생 1만5000여 명이 교내에서 반정부 데모를 벌였고 전북 전주 중앙성당 기도회에서는 김재덕 주교가 “(YS가 아니라) 박 정권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하면서 참석자들과 함께 침묵시위와 철야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문제는 ‘YS 죽이기’가 총재직을 빼앗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예 국회에서 그를 제명해 정계로부터 완전히 추방하겠다는 계획이 선 것이다. 정권이 빌미로 삼은 것은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도쿄특파원 스톡스 기자가 쓴 YS 인터뷰 기사였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거리낌 없는 반대로 체포 직전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 김영삼 씨는 집에서 가진 회견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기사 내용 중 정치 문제로 비화된 것은 다음 대목이었다.

‘김 총재는 “이란은 미국의 크나큰 외교적 불행이었다”고 논평하면서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失策)을 언급했다. 이어 미대사관이 작년 팔레비 정부의 약점을 국무성에 경고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나는 미대사관이 한국에서 이란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총재는 “내가 (그동안)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이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한국의 국내정치 문제에 간여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것은 납득이 안 가는 논리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3만 명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국내 문제에 대한 간여가 아니란 말인가” 반문했다.’

민중 혁명이나 다름없는 이슬람교도들의 반정부 투쟁으로 실각한 이란의 팔레비 왕을 예로 들면서 미국이 당장 ‘직접적으로’ 개입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 달라는 주문은 미국의 내정간섭을 용인하라는 발언으로 해석됐고 이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자극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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