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거위’가 되어 버린 국민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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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오피니언 팀장
허문명 오피니언 팀장
2주 전 출장차 방문한 스웨덴에서 만난 중산층들의 세금에 대한 인식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중소기업 기능공으로 일한다는 한 40대 가장은 월급의 40%를 세금으로 낸다고 했다. “속상하지 않으냐” 물으니 “노(No)”라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내가 낸 세금만큼 (복지 혜택으로) 돌려받는다’는 것과 ‘공무원들이 내 세금을 떼어먹지 않는다’는 믿음이 강했다. 누구를 만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스웨덴의 평균 소득세율은 31%로 국민 대부분이 버는 돈의 30%를 세금으로 낸다. 서비스 및 생필품을 살 때 내는 부가가치세도 25%(한국은 10%)나 된다. 이런데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면 기꺼이 내겠다”고 말했다. 스톡홀름에서 25년 동안 살았다는 쇠데르퇴른대 최연혁 교수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복지제도가 삶의 질을 보장해 주고 질병이나 실업 등 갑자기 닥칠 위기 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방파제라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직후 한국 사회 ‘증세’ 논쟁을 보고 있자니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세금을 단순히 복지 재원이나 예산 확보를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공무원들에게 화가 난다. 아무리 조세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라 해도 국민을 거위로, 세금을 깃털로 생각하는 건 국민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복(公僕)의 자세가 아니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이들이나 그런 발상이 가능할 것이다. 세금은 국민 개개인의 피와 땀의 산물이다. 그래서 ‘혈세(血稅)’다.

이런 세금을 올리려면 ‘읍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에게 정중히 동의를 구하는 게 필요한데 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증세를 발표하는 정부에 국민이 깊은 상처를 받는 건 당연하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대부분 중산층)은 “복지=공짜라고 생각해서 증세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공무원들이 증세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며 “‘증세 없이 복지 없다’는 걸 모르는 국민이 있나. 그런데도 증세가 아니라 우기니 기가 막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세금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지 오래다.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대기업 부장의 말이다. “알다시피 미국에서 탈세는 가장 중한 범죄이다. 선진국 대부분이 그렇다. 소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수준에 맞게 세금을 내야 한다. 그만큼 국세청이 무섭고, 정부가 세금을 공평하게 거둔다는 사회적 믿음이 있다. 우리는 국세청장이 세금 깎아 준다고 뇌물 받아 쇠고랑 찬 모습이 신문 1면에 등장하는 사회 아닌가. ‘제대로 세금 내는 사람은 바보’라는 생각이 팽배한데 누가 선뜻 ‘증세’에 찬성하겠는가. 더구나 아무 설명도 없이 말이다.”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다른 40대 샐러리맨은 “소득 상위 20%가 내는 세금이 전체 세금의 80%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도 많이 내야 하지만 고액 납세자에 대한 존중이 없다.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 돕겠다는 것! 좋다.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국민 돈이 줄줄 새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의 중산층은 치솟는 물가와 사교육비를 감당하느라 노후대비는 꿈도 못 꾸는 ‘적자 인생’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거위’ 운운하니 내상(內傷)이 깊을 수밖에.

대통령의 세법 개정안 ‘전면 재검토’ 발언에 일단 진정된 듯 보이지만 지금 민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대통령이 분명 발표 전에 보고받았을 텐데 마치 몰랐다는 듯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것도 그렇고(몰랐다면 더 큰 문제다), 정부가 대통령의 꾸중이 있자 하루 만에 수정안을 내놓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사과 한마디가 없다. 지금 같아선 증세도 복지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허문명 오피니언 팀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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