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di&Wagner]유려 혹은 웅혼, 神이 된 오페라 거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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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2013년, 탄생 200주년
독일음악의 풍운아 바그너, 기악 성악 드라마 무대 결합한 총체예술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왕 베르디, 벨칸토에 국민정신 더해 궁극적 美추구

오페라의 양대 산맥은 이탈리아와 독일이요, 각각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베르디(이탈리아)와 바그너(독일)다. 그런데 두 거장은 탄생 연도(1813년)까지 같아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비교 대상이다. 누가 더 위대한지에 대한 논쟁도 자주 벌어진다. 굳이 따지자면 예술계에 미친 영향은 바그너가 훨씬 큰 반면 인기 면에서는 보편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베르디가 우세하다. 그러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들이요, 바그너는 독일 오페라의 혁신가인데, 두 나라의 오페라는 ‘음악과 극의 결합’이라는 기본적 의미만 공유할 뿐 접근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육상의 단거리 챔피언이 빠른가, 장거리 챔피언이 빠른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두 작곡가 역시 자기 분야에서 챔피언이며,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기호 문제일 뿐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는 많은 점에서 대조적이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무엇보다도 노래를 중시하는, 그래서 가수 중심의 오페라다. 드라마는 노래를 담는 바구니 정도의 역할이다. 중요한 아리아나 중창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독일 오페라는 문학과 연극의 연장선이다. 바그너의 경우 “드라마는 표현의 목적이요, 음악은 표현의 매체”라고 주장했다. 특히 노래만큼이나 기악 파트를 중시한다. 대신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즉각적인 호소력은 이탈리아 오페라만 못한 편이다.

바그너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에는 음악에 별 재능을 보이지 못했는데, 베토벤을 알고, 베버의 독일 오페라에 열광하면서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풍운아였다. 드레스덴 왕립 가극장의 지휘자라는 안정된 자리를 얻었지만 혁명에 동조한 탓에 추방당했고, 긴 도피 기간 여러 저작을 통해 기악과 성악, 드라마와 무대장치가 종합적으로 결합한 ‘총체예술’이야말로 새로운 오페라의 나아갈 길이라고 선언한다. 그 뜻을 이루고자 착상에서 완성까지 25년이 소요된 4부작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착수한다. 중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작곡하느라 긴 공백이 생긴 4부작의 완성에는 바이에른의 젊은 국왕 루트비히 2세의 도움이 컸다. 루트비히는 어렸을 때부터 ‘로엔그린’에 감명을 받아 바그너야말로 독일정신의 상징이라며 숭배한 인물이다.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은 ‘로엔그린’ 이후 30년간 드러나지 않았던 종교적 상징으로 마무리되었다.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한장면. 동아일보DB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한장면. 동아일보DB
베르디는 바그너보다 5개월 뒤(10월) 이탈리아 북부의 부세토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은인 덕분에 일찌감치 밀라노의 극장 문을 두드릴 수 있었는데, 초기작들은 음악적으로 이탈리아의 전통인 벨칸토 오페라를 계승하되 소재는 외세에 시달린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운동을 고양하는 것에서 취함으로써 여러 지역으로 쪼개져 있었던 이탈리아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민중의 의지로 승화된 전형적인 사례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아타’를 거치면서 베르디는 아름다운 노래 중심의 벨칸토를 극복한 새로운 시기에 접어든다. 특히 ‘시몬 보카네그라’ ‘돈 카를로’ ‘오텔로’ 등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크게 확대되고 극적인 진실도 한층 힘을 얻으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80세에 작곡한 희가극 ‘팔스타프’에서는 노대가의 관조와 통찰이 빛을 발한다. 극과 음악은 단절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되고 관현악도 빈틈없다. 그렇지만 노래가 주도하는 전통은 유지되고 선율은 아름다움을 넘어 궁극을 지향한다.

바그너는 스스로를 영웅시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심각한 열등감이 있었다. 우선 머리가 기형적으로 큰 데다 키는 155cm에도 못 미쳤다. 외모 문제는 여성 편력으로 보상 받으려 했고, 수많은 잘난 여성들이 바그너의 천재성과 저돌성에 넘어갔다. 한편으론 자신에게 유대인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비밀스러운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바그너의 양부는 유대계로 알려져 있는데, 이 양부가 실제 친부가 아닐까 의심한 것이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숄티, 러바인, 바렌보임 등 유대인 지휘자들이 바그너의 탁월한 해석자인 걸 보면 바그너와 유대인 간에는 뭔가 통하는 유전자가 있는 듯하다.

아무튼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과 독일 예술의 승리’를 표방했고, 이는 스스로가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반사적 행동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공연 도중에 박수가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무한선율’을 사용한 것은 독일의 연극적 전통에 따른 것이고, 주인공이 신이거나, 신의 피를 받았거나, 적어도 초인의 경지에 이른 것은 신화를 통한 게르만 영웅 찾기와 연결된다. 선과 악의 대립이 확연한 것은 반유대주의로 해석되곤 한다.

등장인물의 캐릭터 또는 상황마다 정해진 모티브를 긴밀하게 사용하여 튼튼한 건축물처럼 만드는 ‘유도동기’는 구조와 논리를 강조하는 독일적 사고의 산물이다. 고약한 품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바그너는 ‘19세기 예술계의 스티브 잡스’에 해당한다.

반면 베르디는 혁명가는커녕 돌다리도 두드려 가는 신중파였다. 19세기 중후반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역사는 온전히 베르디의 개인사였으나 큰 야망과 목표를 갖고 전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나간 것이었다.

그렇지만 베르디가 위대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음악적 완성도 못지않게 유별한 ‘휴머니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베르디의 주인공들은 왕족이든 평민이든 하나같이 나약한 인물들이다. 세속적인 사랑에 시달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에 괴로워한다. 심지어 악당일지라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베르디의 생각이었다. 부자나 부녀관계를 자주 다룬 점은 너무 일찍 두 아이를 잃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고, 슬픈 아버지상을 다루려다 보니 바리톤을 중용하게 되었다.

베르디는 만년에 거액의 사재를 출연하여 밀라노에 ‘음악가의 휴식의 집’을 지었다. 은퇴한 성악가들이 무료로 지내도록 한 시설이고, 자신의 사후에도 인세로 운영하라고 했다니 죽을 때까지 측은지심의 휴먼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살았던 셈이다.

유형종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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