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멈춰라, 설국열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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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달려야 하지만 달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정거장에서 멈춰 사람을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왜 멈출 줄 모르지요? 정거장이 없는 열차, 멈출 수 없는 열차는 무엇을 닮았기에 이리도 익숙할까요?

설국열차, 분명히 계급투쟁을 연상시킵니다. 1970, 80년대도 아닌데 시대에 맞지도 않고 메시지도 과잉이라며 별점 하나, 둘을 주는 ‘돌직구쇼’ 패널들의 용감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 영화를 봤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패널들은 ‘설국열차’를, 꼬리 칸 계급이 봉기를 일으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하는 마르크시즘적 영화로만 본 거지요?

영화관이 꽉 찼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면 관객이 왜 그렇게 모여들까요? 칸칸이 구분된 설국열차는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우리 사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잘난 사람들의 안정된 세상은 못난 사람들의 분노와 저항이 무서워 망치와 도끼로 지키는 위태로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잘난 사람들이 탄 칸, 보셨지요? 깨끗하고 풍요롭지만 당당한 인간다움이나 덧정은 없고, 목소리 높은 사람은 있으나 혼이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도 없고 혼도 없는 삶을 살겠다고 목숨 바쳐 계급투쟁에 나서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생각난 인물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푸코였습니다. ‘감시와 처벌’의 저자 푸코는 권력의 해부학자라고까지 합니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삶의 외부에 존재하는 강제력이 아니라 삶의 내부에서 인간을 점령해서 인간을 제조하고 조립하는 힘입니다. 푸코는 사회 여러 층에 퍼져 있는 권력에 주목하면서 그 권력들이 스크럼을 짜고 효율적으로 얽혀 있는 생산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합니다. 저항권이 권리임에도 권력에 대한 저항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효율성과 생산성 때문인 것입니다. 누구나 정해진 자리가 있다고 선포하는 설국열차를 보십시오. 생존에 적합한 효율적 방식으로 칸을 나누고 승객들을 통제하고 있지요? 먹는 음식에서 믿음의 체계까지 기차 권력이 주도합니다. 웃기지 않으셨습니까? 제자리를 지키라고, 분수를 알라고, 너희들의 운명은 꼬리 칸이라고 경고하는 틸다 스윈턴의 말! 그건 시인과 촌장의 노랫말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풍경인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감시 시스템입니다. 분수가 아니라 모멸인 거지요.

그런데 왜 그런 모멸이 용인되지요? 기차 밖으로 나가면 얼어 죽는다는 믿음 때문 아닙니까? 그 믿음체계가 통제와 감시, 그리고 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인 거지요. 푸코에 따르면 그 믿음체계, 지식체계까지 권력입니다. 생존에 목을 맨 사람들이 생존하고 싶은 열망을 강하게 드러내며 통제에 길들수록 권력은 그들을 착취하면서 시혜를 베푼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바퀴벌레로 만든 음식을 주면서 말입니다.

엄마도, 음식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 설국열차에서의 저항은 바로 그 감시와 통제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보고 있어도 보지 않았던 기차 밖, 눈의 나라 설국을 바라보고 희망을 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동안은 눈을 들어 기차 밖을 보지 못했을까요? 왜 기차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기차 밖으로 나가면 얼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바로 문을 벽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보고 있어도 보지 못했던 시간, 불안과 두려움에 저당 잡혀 있던 시간을 똑바로 응시해야 문이 보이고, 밖이 보이고, 마침내 열차를 세울 수 있습니다, 설국나라의 백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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