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정선]병 고치러 병원 갔다 병 얻어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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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한국소비자원 의료법률자문위원 변호사
이정선 한국소비자원 의료법률자문위원 변호사
최근 폐렴과 패혈증의 원인균으로 지목되면서 공포가 확산되었던 ‘OXA-232’ 계열의 ‘카바페넴 계열 항생제 분해 효소 생성 장내세균(CPE)’은 올 5월 인도에서 부상당한 뒤 국내로 이송된 한국인이 국내 병원 환자들에게 균을 옮긴 것이었다. 환자들이 다른 환자들에게 또 옮기는 식으로 전국 13개 병원에서 총 63명의 보균자가 생기는 사태가 발생했다(동아일보 8월 6일자 보도). ‘슈퍼 박테리아(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세균)’가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보건당국은 5일 “치료 가능하며 위험성도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CPE는 항생제 ‘카바페넴’에 내성을 지닌 장내세균(CRE)의 일종이다.

보건당국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해하는 시민이 적지 않다. 이는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생소한 균 자체가 주는 공포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제의 균이 병원에서 옮겨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번 균도 병원에서 다른 환자들이 뜻하지 않은 균이나 오염물질에 노출되어 퍼지게 됐다.

균이 옮겨지는 통로는 다양하다. 의료진의 의복이나 수술기구 등을 통해서도 옮겨질 수 있다. 100여 개의 큰 종합병원에서는 감염관리실도 두고 있고 감염관리 전문인력도 있지만 중소병원에는 비용과 인력과 예산 배정이 안 되어 있는 만큼 감염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거의 취해지지 않는다. 특히 환자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수술 현장의 멸균관리도 허술하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술기구 중 3분의 1 정도가 멸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재사용된다고 한다. 이 경우 치명적인 감염이 발생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환자가 사망하기도 한다.

2010년 대한의학회의 국제학술지 7월호에는 국내 한 대학병원의 중환자실 환자 57명을 조사한 결과 19명에게서 슈퍼 박테리아의 일종인 다제내성(多劑耐性) 아시네토박터균(MRAB)이 검출됐고 이 중 4명이 이 균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 논문이 실렸다. 이 균은 대부분 병원 중환자실에서 많이 검출되는 균이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병원 내 감염을 의심하며 피해 사례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A 씨의 아버지는 인공관절 수술 중 슈퍼 박테리아의 일종인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에 감염된 이후 항생제 투여 등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몇 개월 만에 사망했다. 또 다른 환자 B 씨는 척추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부위가 감염되어 거듭된 재수술 끝에 장애진단을 받았다. 한국소비자원은 수술 당시 감염관리가 소홀했다며 병원에 배상금 지급을 권고한 바 있다. 2013년 1분기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의료분쟁 사례 중 이런 수술 관련 분쟁만 68건(43.9%)에 이른다.

하지만 상담 받은 환자들이 보상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병원 내 감염이 원인이라는 것을 환자 스스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고령이어서 면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병원 내 감염을 100% 방지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법원도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구체적이고 강제성 있는 지침을 마련하여 정기적으로 관리감독을 해야 한다. 현재 4년에 한 번씩 하는 병원 인증평가 항목 중 멸균 조치 관련 부문은 권고 사항에 불과하고, 멸균 여부만 확인하는 정도여서 수술기구를 통한 감염관리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의료기구의 특성에 맞는 정확한 멸균 방법에 대해서는 공인된 지침조차 없다. 이번에는 그나마 치료 가능한 박테리아였기에 망정이지 슈퍼 박테리아라면 문제가 크다. 현재 정부 안에서도 슈퍼 박테리아 감염 관리를 위한 전담 부서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병원 내 감염관리 시스템은 ‘슈퍼 박테리아’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정선 한국소비자원 의료법률자문위원 변호사
#폐렴#폐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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