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연구단지 40년]<中> 국가경제 기틀 다진 ‘기술의 요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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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반도체 원자로… ‘과학 코리아’ 세계에 우뚝 세웠다

대학원생들 연구원 찾아 현장수업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우주광학센터에서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 학생들이 대구경광학렌즈 가공 장비에 대한 교수(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 제공
대학원생들 연구원 찾아 현장수업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우주광학센터에서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 학생들이 대구경광학렌즈 가공 장비에 대한 교수(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 제공
“개발 반대 논리와 싸우지 않고 안주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마 이동통신 선진국들의 뒤만 따라가는 신세가 됐겠죠.”

한국을 통신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방식을 1989년 개발한 주역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기철 책임연구원의 회고다. 그는 당시 시스템연구부장으로 개발 총책을 맡았다. 당시 정부와 학계 산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한 CDMA의 경제적 가치는 54조3923억 원이나 됐다(2012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조사). 정부가 전자통신연구원에 35년간 투입한 연구개발비(5조9421억 원)의 10배가 넘는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지난 40년간 이처럼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 휴대전화 ‘Made in KOREA’ 신화

1993년 가을 전자통신연구원 6연구동 실험실 문에는 ‘CDMA 작전본부’라는 문패가 붙었다. 개발팀은 전투를 방불케 하는 연구 끝에 1996년 4월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휴대전화 코리아’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89년 CDMA 개발에 나설 당시만 해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공동 개발을 제안해온 미국의 벤처기업인 퀄컴의 CDMA 이동전화 실험 시스템이 검증이 안 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접속방식(유럽은 GSM, 미국은 TDMA)은 한 단계 낮은 수준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방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도 많았다. 그럼에도 연구원은 시장 선도와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전자통신연구원은 35년 동안 CDMA 등 각종 연구개발로 169조8095억 원의 경제적 성과를 냈다. 한남대 경제학과 설성수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기초과학지원연구원은 투입 예산의 36.7배, 생명공학연구원은 28.62배, 천문연구원은 41∼61배의 대박 효과를 거뒀다.

○ 한국의 성과물 세계로 진출

원자력연구원은 중수로 경수로 핵연료 제조기술의 국산화에 이어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 일괄 시스템을 수출했다. 기계연구원은 23년간 자기부상열차 관련 연구에 매달린 결과 시속 110km로 운행할 수 있는 도시형 자기부상열차의 핵심 기술을 확보했다. 9월에는 인천국제공항 6.1km 노선에서 자기부상열차를 상용 운행할 예정이다.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실용화되는 것.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올해 1월 우주로켓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다. 나로호는 러시아 기술을 상당 부분 도입한 것이지만 국내 기술로 개발 중인 한국형 발사체 개발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 이로써 국내 발사체 기술 수준은 선진국 대비 46%에서 83%로 향상됐다.

한국화학연구원은 세계 최초의 촉매를 이용한 나프타 분해공정 기술을 최근 개발했다. 이 공정을 활용하면 20년 걸리는 석유화학의 신공정 개발 기간이 10년으로 단축된다.

○ 과학인재의 ‘화수분’으로 자리매김

삼성의 플래시메모리 개발은 KAIST 출신들이 주도했다. 삼성전자 메모리본부장 출신의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현 KAIST 총동문회장)은 KAIST 석사 4회, 뒤를 이어 플래시메모리 개발실장을 맡았던 신윤승 씨는 6회, 서강덕 정칠희 씨는 7회, 전영현 씨는 12회다. 물리학과인 정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장순흥 KAIST 교수는 “삼성이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자 일본 정계의 고위층이 찾아와 KAIST를 거쳐 삼성 같은 대기업으로 진출하는 인재 공급 시스템에 관심을 보였을 정도”라고 전했다. 임 전 사장은 “KAIST 출신들은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산업계와 이공 분야 학계, 고위 공직 등에도 많이 진출했다”고 말했다.

대덕특구는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의 ‘저수지’ 역할을 해왔다. 1968∼90년 국내 연구소에 영구 귀국한 해외유치 과학자 517명 가운데 상당수가 대덕특구에 둥지를 틀었다가 산업계와 학계로 자리를 옮겨 해당 분야의 발전을 주도했다. 설 교수는 “CDMA 개발과 ‘원자력 기술 독립 두 가지만 따져도 본전을 뽑고도 남은 셈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정화조와 결핵약을 만들어 보급했고 전자통신연구원은 TDX(전자식자동교환기) 개발로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어 국민 생활을 크게 바꿔 놓았다”고 평가했다.

과학 비평가인 세민환경연구소 홍욱희 소장은 “대덕특구의 정부출연 연구소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최고의 시설을 갖췄다”며 “다만 정부가 한 과제에 집중할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하면서 노벨상에 근접한 연구자가 없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기초과학의 스페셜리스트를 키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대덕연구단지#휴대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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