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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 백성 금기어 한 자라도 줄이려 ‘한 글자’ 이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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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 백성 금기어 한 자라도 줄이려 ‘한 글자’ 이름 썼다

동아일보입력 2013-08-12 03:00수정 2013-08-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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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수 前국립고궁박물관장 ‘조선 국왕 호칭과 묘호’ 논문서 분석
올해 5월 5일 서울 종로구 훈정동 종묘에서 열린 종묘대제. 종묘에 모셔진 왕들의 신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묘호가 올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으레 배우는 조선 국왕의 이름. 27대 왕들을 외우다 보니 왕 이름은 무조건 ○조 ○종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는 왕이 승하한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지어 올리는 묘호(廟號)다. 당사자인 왕은 살았을 때 이런 호칭을 들어본 적도 없다.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58)이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동원학술논문집’ 제14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에 따르면 조선 왕의 이름은 수십 개에 이른다. 태어날 때 불리는 호칭부터 세상을 떠난 뒤 불리는 시호(諡號)까지 상황과 시점마다 각양각색이었다.


○ 아기씨(阿只氏)의 이름(諱)은 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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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자녀는 태어나면 일단 ‘아기씨’라고 불렀다. 아기(阿只)에 존칭인 씨(氏)를 붙인 것이다. 원자(元子)면 원자아기씨, 세손은 세손아기씨였다. 웃어른들은 원자나 원량(元良), 충자(沖子·어린아이)라 불렀다. 영조는 세손이던 정조를 20세가 되도록 충자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왕도 따로 이름이 있었다. 2011년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세종대왕에게 일갈하던 “이도(李L)”. 이는 왕의 본명인 휘(諱·생전 이름)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조선 왕들은 세종처럼 대체로 이름이 외자였다. 27명 역대 왕 가운데 두 자로 된 이름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선조 인조 철종 고종뿐이다. 그러나 이들도 단종과 태종을 제외하면 모두 이후에 외자로 개명했다.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나 평민처럼 살았던 철종은 왕이 될 줄 몰라 이름을 두 자로 썼다가 후에 바꿨다.

외자를 선호한 것은 ‘기휘제도(忌諱制度)’ 때문이다. 유교문화권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거니와 글자로 쓰는 것도 금기시했다. 이러니 한 자라도 줄여주는 게 신하와 백성을 돕는 길이었다. 왕의 이름은 육조 참판과 당상관 이상이 모여 지었는데, 최대한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선택했다. 심지어 자전에 없는 글자를 집자(集字)하기도 했다. 후대로 갈수록 기휘제도는 더욱 엄격해졌다. 왕 이름과 음만 같아도 쓰기를 꺼렸을 정도였단다. 이에 영조는 이 제도의 폭넓은 적용을 금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왕의 이름에 쓰인 부수는 모두 13종류인데, 일(日·7번)과 왕(王·4번)을 가장 많이 썼다. 귀하고 좋은 글자를 넣으려는 신하들의 충심이었다.

○ 종(宗)보다는 조(祖)가 낫다?…각하(閣下)는 장관급 호칭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면 왕은 살았을 때 흔히 전하(殿下)라고 불렸다. 이는 중국 황제의 폐하(陛下)보다 한 단계 낮은 호칭이다. 폐하는 궁전 뜰 저편 섬돌(陛) 아래서, 전하는 계단(殿) 아래서 부른다는 의미다. 높을수록 멀리 떨어져서 아뢴다는 뜻이 담겼다. 왕세자는 더 낮춰 ‘저하(邸下)’라고 했다. 각하(閣下)는 대신, 즉 장관급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대통령 각하’란 말은 무지의 소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묘호는 이래저래 말도 탈도 많았다. 사실 조종(祖宗)을 먼저 쓴 중국은 건국시조만 조를 붙이고, 이후 왕에게는 종을 썼다. 조선도 문종 때까지는 이를 지켰는데, 세조부터 원칙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들인 예종이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나라를 새로이 세운 공덕이 크다”며 조를 쓸 것을 고집했다.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한 그늘을 애써 지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종을 둘러싼 논쟁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인종은 아버지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가 크다 하여 조를 쓰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했다 하여 조를 썼으나 당시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영조와 정조는 첫 묘호는 영종과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재위 26년과 36년에 조로 바꿨다. 정 전 관장은 “조선 왕들은 종보다 조가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생전에 자신이 원하던 묘호를 얻은 왕들도 있다. 예종(睿宗)은 스스로 묘호를 짓고 “죽어서 이를 얻으면 만족하겠다”고 수시로 말했다. 생전에 각각 ‘명(明)’과 ‘영(英)’을 은근히 기대했던 명종과 영조도 뜻한 바를 이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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