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연구단지 40년]자갈 던지며 수류탄 연구… ‘TDX개발 못하면 처벌’ 혈서 쓰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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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심 하나로 이룬 국산화사업

1971년 7월 중순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 인근 한강 백사장.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의 남자들이 모여 며칠째 하루 종일 ‘자갈 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한필순 국방과학연구소 병참물자개발실장(현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과 ‘W이론’ 창시자인 이면우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원 겸 서울대 교수(현 울산과기대 석좌교수), 김지학 서울대 사범대 체육과 교수(작고) 등이었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로부터 ‘한국형 수류탄 개발’ 미션을 받은 한 실장이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면 아이디어맨인 이 교수가 이에 대해 조언을 했다. 김 교수는 수류탄 투척 동작에 대해 구체적인 도움을 줬다. 이들이 자갈 던지기를 한 건 수류탄 형태를 구상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론은 ‘사과형, 380g’ 수류탄이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다는 거였다. 이를 놓고 “그럼 왜 미군은 ‘고구마형’이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원시적인’ 실험 결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만큼이나 정확했고 놀라웠다. 당시 미군이 수류탄을 사과형으로 교체 중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의 수류탄 개발비가 쌀 67가마니(가마니당 7500원) 값인 50만 원이었을 적 얘기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기본화기(수류탄, 기관총, 박격포) 국산화 사업(일명 ‘번개사업’)을 이룬 과정은 한 실장이 원자력연구원장에 오른 뒤 쓴 저서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에 등장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신응균 국방과학연구소장이 기본화기를 국산화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자 “미군이 철수를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모두 죽는 위기 상황에서 ‘된다. 안 된다’ 따질 수 없으니 무조건 만들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대통령은 ‘불가능’이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았고 과학자들도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난관을 넘었다.

1986년 12월 14일, 영광원자력발전소(현 한빛원전) 3, 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를 맡은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로 기술을 배우러 떠나는 원자력연구원 공동설계팀 환송식장. 때아닌 ‘대한민국 만세’가 울려 퍼졌다. 한 원장은 “한국형 원자로(경수로)의 탄생은 전적으로 여러분 손에 달렸다. 실패하면 아예 돌아오지 마라”라며 만세 삼창을 선창했다.

1982년 초 당시 최순달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은 이른바 ‘TDX(시분할 전자교환기) 혈서’를 정부에 보냈다. ‘연구원 일동은 신명을 바쳐 TDX 개발에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배수진의 각서였다. 그 시절에 천문학적인 액수인 24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받기 위해서는 정부에 확신을 심어줘야만 했다. 연구원은 3년 만에 TDX 개발에 성공해 교환기 부족에 따른 전화 적체를 말끔히 해소했다. 이로써 한국은 통신 선진국에 진입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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