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고기정]일본을 더 내치면 안 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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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일본 기자 H를 만난 건 일본이 욱일기(旭日旗) 공식화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6일이었다. 불편한 자리였다. 뜻밖에 그가 먼저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을 성토하고 나섰다. 보수주의 이상론에 사로잡힌 아베가 일본을 잘못 이끌고 있으며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이다.

기자는 자민당이 지난달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것은 국민들이 아베 노선에 찬성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H는 자민당이 투표율 52.6%의 선거에서 34.7% 득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민 10명 중 2명의 지지도 끌어내지 못한 승리였다는 것이다. 아베노믹스로 경제 문제에 희망을 제시했기 때문에 1당으로 인정해 준 것이지 좌충우돌식 대외 정책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건 아니라고도 했다.

한중일 3국 외교는 일방적인 힘의 쏠림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다. 역사와 영토 문제에서는 한중이 일본과 대립하고, 북한 문제에서는 한일이 중국과 맞서 왔다. 2010년 천안함 국면에서 그나마 한국이 중국을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함께 일본이 뒤를 받쳐줬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 최근 북핵 대처 과정에서 한일과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이를 근본적 변화로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한국으로서는 중국도 필요하지만 일본도 절대 내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지금 한일 관계는 긴장과 대립을 넘어서 과잉 마찰과 파탄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싶다.

베이징(北京) 외교가에서는 올해 한중일 정상회담이 불발되면 내년에는 누가 주최권을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이 나온다. 일정대로라면 올해는 한국, 내년에는 일본이다. 그런데 올해를 건너뛰게 되면 내년에도 한국이 주최국이 돼야 한다는 게 한국과 중국 측 견해인 듯하다. 중국으로서는 일본에 주최권을 넘기는 게 마뜩잖고 한국도 이런 논리가 싫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는 동북아 3자 구도에서 한국이 중국과 노골적으로 일본을 ‘왕따’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주최국으로서 양측을 회담장으로 견인해낼 의무와 함께 권리 또한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아베 정권의 우경화 폭주가 계속되는 한 국민정서를 감안해서라도 일본에 선뜻 손을 내밀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중 대 일본 구도가 장기화되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이롭지 않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불안정한 형세다. 현재 중-일 갈등의 근저에는 청일전쟁 이후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일본에 동아시아 헤게모니를 내놓은 중국이 100여 년 만에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겠다는 뜻이 깔려 있다. 이는 정치체제와 사회구조가 주변국과 다른 나라가 이 지역의 규칙 제정자(rule-setter)로 등극함을 의미한다. 일본이 군국주의적 퇴행을 보여줬다면 중국은 무례하고 일방적인 힘의 외교를 보여줬다. 한국은 이런 중국과 호흡을 맞춰 살아가야 할 테지만 주변국과 함께 중국을 견제해야 할 상황에도 처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한국이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 이익을 생각한다면 나중을 고려하지 않은 채 중국과 손잡고 일본을 마냥 패대기치는 게 합당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당장 정부 간 교류가 어렵다면 일본 내 진보그룹과의 소통이라도 늘려야 한다. 지난주 동아일보가 연재한 ‘일본의 양심세력’은 한일 간 접점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국민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표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은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늦으면 안 된다.

그날 H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스시집에서 삭힌 홍어를 처음 맛봤다. 한 손으로는 코를 잡아 쥔 채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좋은 경험’이었다며 엄지를 세웠다. 아직 한일 간에는 서로를 잡아끌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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