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몽블랑 만년필과 김영란법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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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810m의 몽블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프랑스어로 ‘하얀 산(Mont Blanc)’이란 뜻이다. 멀리서 보면 너무나 아름다워 ‘하얀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몽블랑의 산봉우리들을 변형된 육각형 모양의 하얀 별로 형상화해 로고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독일제 고가 만년필 몽블랑이다.

▷조지프 필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중장)이 2008∼2011년 한국 근무 당시 한국인으로부터 고가의 선물을 받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미 국방부 감사에서 적발됐다. 그 선물 중에 우리 돈으로 160만 원이 넘는 도금한 몽블랑 만년필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 클라시크’도 들어 있었다. 필 전 사령관은 “오랫동안 사귄 한국인 친구로부터 선의로 선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조사관들은 한국인 친구가 영어를 못하고 둘이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했다는 점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 전 사령관은 한국 근무 이후 1년 가까이 보직이 없었고 지난해 계급이 한 단계 강등된 소장으로 전역했다.

▷한국에서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제정안이 지난달 30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몽블랑 만년필은 김영란법으로 말하자면 100만 원 이상 금품에 해당한다. 김영란법 원안은 직무와 관련 없어도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공직자는 모두 형사처벌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직무와 관련 없이 금품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도록 하는 데 그쳤다.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과태료를 문 공무원은 옷을 벗어야 하니까 크게 후퇴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처럼 뇌물과 선물 사이에 명절 떡값, 전별금, 휴가비, 향응 등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다양한 개념을 가진 나라도 보기 드물 것이다. 모두 공무원이 돈을 받고도 직무와 관련이 없다고 우기면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김영란법은 공무원 사회에 더는 선물과 뇌물 사이의 중간지대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선물과 뇌물 사이의 기준점을 100만 원으로 일률적으로 정해 단순 무식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부패를 없앨 수 없는 지경에 온 우리의 처지가 씁쓸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몽블랑 만년필#부정청탁 금지#김영란법#뇌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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