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권명중]볼펜시장이 외국산에 점령된 까닭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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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중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권명중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71년 미국 닉슨 행정부는 집세 상한제를 실시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이 부족해지자 집주인들이 집세를 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히려 주택임대 공급이 줄어 세입 희망자들은 집 구하기가 더 힘들어졌고, 기존의 세입자들도 집주인에게 뒷돈을 주어야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정부의 섣부른 정책이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에 대해서는 켈빈 랭커스터나 리처드 리프시 같은 경제학자가 ‘차선의 일반이론’을 통해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다.

이 제도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적합하다고 고려되는 업종에 대기업의 시장 진입을 금지한 제도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시장이 보호되고 경쟁이 제한되자 사업에 안주한 것이다. 문구류 중 볼펜은 20년 동안 디자인 하나 바뀌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모델 개발이 없었다. 결국 제품의 세계경쟁력은 떨어졌고, 일본과 독일기업이 이 시장을 거의 점령해버렸다.

이런 예가 특수한 경우가 아닌 것은 1991년부터 10년 동안 다른 산업들은 성장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유업종제도로 지정된 산업에서의 생산량은 정체되거나 약간 감소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문제를 뒤늦게 깨닫고 정부는 2006년에 이 제도를 폐지했다.

2000년 전후 컴퓨터, 통신, 방송의 융합이 경제혁명을 일으켜 모든 산업에서 기술혁신이 빈번해지고 글로벌화가 가속됐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이나 재무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중소기업은 성과를 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는 확대되었고, 이 때문에 특단의 대책으로 마련된 것이 2011년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다.

이 제도는 내용면에서는 이미 실패한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의 재판이다. 다른 점은 중소기업에 경쟁력을 강화할 시간을 마련해주자는 취지에서 적합업종에 대기업의 시장 진입 제한을 최대 6년까지 한시적으로 정하고, 제도 시행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합의를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점이다.

중소기업을 도와야 한다는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제도가 시행되었지만, 사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06년 고유업종제도 폐지와 함께 이미 적합업종에 투자를 한 대기업의 사업 철수부터 중소기업으로 시작해서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을 시장에서 철수시켜야 하는 것까지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인 재산권이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우려되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시행되었고 현재 이에 순응해서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역할을 분담해 동반성장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법제화하는 일환으로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의 자율적 시행 취지를 무효화하고, 대기업의 사업 이양을 법적 강제화하려는 법안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서 논의 중이다. 이 제도가 법제화되면 이 제도가 태생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생산의 비효율성 문제’가 더 드러날 것이다. 동반성장위원회에서 민간자율 방식을 택한 이유는 한시적인 비효율성을 수용하더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중소기업의 생산과 경영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라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적합업종의 강제적 법제화는 이런 가능성을 낮추게 될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 라구람 라잔 교수의 훈수처럼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경쟁하고 협력해가면서 획득하는 것이지, 배제와 보호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권명중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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