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41>나의 빈티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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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빈티지
-박도희(1964~)

나쁘지 않은 시
늦가을을 닮고 싶은 의자
배터리가 다 된 시계
죽은 매미들이 새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
장난의 운명을 믿는 헝겊 뼈다귀를 물고 오는 강아지
제 속도감을 즐기는 햇살
50% 세일 아이스크림
각종 펜 사랑
시선이라는 행위 예술을 위하여
막대사탕을 물고 타는 버스
모자란 슬픔
현혹=과제
패, 경, 옥 같은 택배물
늙기로 한 터널
오후 찻잔에 담는 비
기어코 찾으려고 하는 눈물에 관하여

제법 연식(年食)이 있는, 그럼에도 그 매력과 값어치가 여전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 세월만큼 더해진 물건, 빈티지. ‘유행을 건너뛰어’ 가치 있다는 빈티지를 지니는 게 언제부턴가 유행이 된 듯하다. 이참에 나한테도 빈티지 하나쯤 없나 곰곰 생각하다 집 안을 둘러본다. 아니나 달라, 없네. 글쎄, 한 면에 열두 달이 모두 인쇄된 1958년 달력? 이십 년쯤 전에 한 친구가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구해준 선물이다. 이 달력은 나와 연식이 같은, 나만의 빈티지라 할 수 있겠다.

그저 묵은 것이기만 해서는 빈티지 반열에 들지 못한다.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는 존경받지 못하는 노인처럼. (살아온 세월이 향기로 느껴지는 노인을 ‘인간 빈티지’라고 말한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상스러운 비유이리.) 아무튼 그 소유자의 안목과 재력을 짐작하게 한다는 빈티지. 그런데 시인 박도희가 제시하는 건 제가 좋아하는 것들, 오롯한 존재의 빈티지다. 시인은 첫 번째로 ‘나쁘지 않은 시’, 즉 ‘나쁘지 않은 시를 쓰기’를 꼽는다. 그리고 ‘늦가을을 닮고 싶은 의자’와 ‘장난의 운명을 믿는’ 장난꾸러기 강아지. 장난처럼 운명이 시작되는 일이 인생사에는 많다. 연애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다. 우연은 운명의 장난. 운명의 작은 틈, 작은 인연이 장난처럼 삶을 좌회전 우회전시킨다. 그렇거나 말거나 태양이 개개인 인생사에 관여하겠는가! 느슨하고 나른하게 제시되는 시인의 빈티지 목록에서 독자는 시인의 취향과 일상과 인생관을 엿본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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