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112죠? 9번 벽 근처에 강도가… ”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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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檢, 우범지역에 ‘숫자벽화 프로젝트’

서울 용산구의 한 골목. 벽화에는 ‘어린왕자’를 형상화한 그림과 숫자 ‘9’가 담겨 있다. 이는 범죄예방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디자인된 벽화 가안이다. 벽화가 완성되면 112 신고자는 “별, 새가 그려진 9번 골목”이라고만 설명해도 경찰에 정확한 위치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서울 서부지검 제공
서울 용산구의 한 골목. 벽화에는 ‘어린왕자’를 형상화한 그림과 숫자 ‘9’가 담겨 있다. 이는 범죄예방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디자인된 벽화 가안이다. 벽화가 완성되면 112 신고자는 “별, 새가 그려진 9번 골목”이라고만 설명해도 경찰에 정확한 위치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서울 서부지검 제공
친구 집들이에 갔다가 낯선 동네의 밤길을 걷던 20대 여성 김 씨. 골목 구석진 곳에서 모자를 쓴 남자가 한 취객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 남자는 몽둥이로 취객의 머리를 한 차례 내려친 뒤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아, 어쩌지.’

김 씨는 다급하게 112에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웬 강도가 취객을 털고 있어요. 빨리 좀 와 주세요.” “어디세요.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여기가 △△역 근처 같은데…. 아! 벽에 별이 그려져 있고 9자가 써 있어요.”

112에 신고한 지 약 2분여. 순찰차의 불빛이 보인다. 주소 대신 골목 벽화만 설명했는데도 경찰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출동한 것. 경찰은 취객을 퍽치기하던 강도를 잡아 경찰서로 압송했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조만간 이와 같은 일이 현실화된다.

서울 서부지검(지검장 조성욱)은 9월부터 관내 우범지역 골목에 숫자와 함께 벽화를 그려 넣어 범죄 예방 환경을 만들겠다고 7일 밝혔다. 음침한 골목에 밝은 분위기의 벽화를 그려 범죄 충동을 억제하고 주소를 몰라도 범죄 발생 지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벽화 속에는 큼지막한 숫자가 들어간다. 그동안 골목에서 강도, 강간 등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112 신고자가 정확한 주소를 알지 못하면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벽화가 완성되면 벽에 그려진 그림과 숫자만 말해도 장소를 확실히 알 수 있어 기존 신고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 검찰은 지난달 서울 용산경찰서로부터 관내 범죄 발생 빈도가 표기된 자료를 받아 이 중 5개 골목을 시범구역으로 선정했다. 이어 관내 구청과 미술대학의 협조를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처음엔 관내 구청 관계자들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골목에 벽화를 그리려면 동네 거주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데다 예산이 다소 들어가는데 범죄 예방 효과에 대해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1994년 ‘지하철의 흉물스러운 낙서 지우기’로 범죄 건수를 절반 가까이 줄인 뉴욕 시의 사례를 들며 “벽화를 통해 골목의 음침한 분위기를 없애고, 숫자까지 미학적으로 삽입해 112 신고의 효과를 높이겠다”고 설득했다.

이 사업에 가장 관심을 보인 곳은 용산구청이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시범적으로 5개 골목을 꾸민 뒤에 범죄 예방 효과와 주민 반응이 좋으면 다른 골목으로 확대할 예정”이라면서 “주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만 있다면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업에는 홍익대 미대 학생들이 재능 기부 형식으로 참여한다. 대학 측은 지난달 시범골목을 사전 답사한 뒤 디자인안을 완성했다. 7일 검찰은 주민, 용산구청, 경찰 실무자들과 함께 골목에 번호를 매기고 벽화 디자인에 대해 논의했다. 벽화 프로젝트는 9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구청 관계자는 “많은 신고자가 정확한 주소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112에 전화를 하는데, 벽화가 완성되면 장소를 정확히 알릴 수 있어 범죄 신고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예방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 예방 환경 설계는 서부지검이 구상한 ‘범죄에 대한 4단계 대응 방안’ 중 1단계에 해당한다. 검찰 측은 5월 초 사전 예방-교사 의견 청취제도(학교폭력일 경우)-치유-사회 복귀 등 4단계 매뉴얼을 마련했다. 이들은 지난달 이화여대와 연계해 소년사범의 정서 치유를 위한 음악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청사 내 카페에 가정폭력 피해자를 고용해 자립을 돕는 등의 활동을 통해 매뉴얼을 실행에 옮겼다.

김병현 서부지검 형사4부장은 “범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 예방과 발생시 신속한 처리”라며 “골목 번호를 넣은 벽화 그리기 사업은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용산#숫자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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