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박정희와 중정 요원들에게도 하늘의 은총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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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3>최후진술

재판정에 선 김지하. 민청학련 재판을 받을 때의 모습이다. 동아일보DB
재판정에 선 김지하. 민청학련 재판을 받을 때의 모습이다. 동아일보DB
김지하는 재판부 기피신청을 한 75년 5월 19일부터 1년 반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김지하의 말이다.

“나는 이미 목을 떼서 감방에 두고 왔기 때문에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 다만 불쌍한 사람은 아내였다. 재판하는 날은 그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가족들 만나는 접견일이기도 했다. 아내 얼굴은 늘 반쪽이고 어린 아들 얼굴도 샛노랬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재판이 열릴 때만 되면 아버지 보러 간다고 긴장해서 잠을 못 자곤 했다고 한다.”

드디어 마지막 공판이 다가왔다. 76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23일이었다.

이날 김지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2시간이나 이어진 재판에서 약 3시간 15분에 걸친 최후진술을 한다. 그의 최후진술은 나중에 모두 기록으로 남겨지는데 변호를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의 말(‘인권변론 한 시대’)이다.

“재판을 시작할 때 형사소송법상 등사·녹취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사건의 중요성이나 성질에 비추어 재판 전 과정을 그대로 기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랏돈이 없으면 피고인 쪽에서 비용을 대서 속기사를 대겠다고 했다. 이를 재판부에서 받아들였다. 그날 최후진술이 정확히 기록된 것은 우리나라 형사재판 사상 처음이었다.”

김지하는 이날 원고도 없이 투옥과 투쟁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과 철학을 쏟아냈다. 다시 홍 변호사의 증언이다.

“재판정을 최고의 무대로 삼아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어찌나 감동적이었는지 어떤 면에서는 한마디로 ‘참 대단한 배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지하가 연극 연출도 하고 마당극도 하고 희곡도 썼다는데 정말 배우로서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날 한 최후진술은 그 몇 달 전인 8월에 발표한 옥중 양심선언과 함께 빼어난 문학적 성취이자 시대적 증언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20여 쪽에 달하는 전문이 그의 책 ‘남조선 뱃노래’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날 최후진술을 통해 먼저 중앙정보부가 자신에게 했던 회유공작을 고발하면서 정권에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정보부의 고급 요원 둘이 내게 오더니 베트남 패망 이전에는 ‘당신의 석방 여부는 당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으니 협조적으로 나올 수 없느냐’고 했고, ‘양심선언’ 직후에는 ‘장관 될 의사가 없느냐. 고집만 부리지 말고 협조적으로 나오면 빛도 보고 출세도 할 텐데 무엇 때문에 모두가 손을 들고 있는 판에 당신만 끝까지 버티고 있느냐’고 했다. 나는 ‘안 나간다. 현 정권 마음대로 휘두르는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안 나간다’고 그랬다. 10년이고 20년이고 징역 살겠다고 했다…나는 징역 살 각오는 돼 있다. 그런데 중(重)죄수인 내가 장관도 되고 말만 잘하면 석방도 될 수 있다는데 도대체 죄가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 또 공산주의자라는 것인지 아닌지, 인혁당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온 삶의 정체성은 “‘시인의 삶’이었다”고 했다.

“현 정부는 내가 가난뱅이로 자라나 생래적으로 부자와 자본주의를 증오하는 악랄한 공산주의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라는 국민의 8할 이상이 가난한 민중이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주의 우범으로 몰아세우는 정부라면 어떻게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있겠나…나는 시인이다. 시인이란 본래부터 가난한 이웃들의 저주받은 생(生)의 한복판에 서서 똑같이 고통 받고 신음하며 그것을 표현하고 고통과 신음의 원인들을 찾아 방황하고 그 고통을 없애며 미래의 축복받은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고 희망과 결합시켜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시인을 민중의 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에게 처해진 잔인한 수감생활도 공개됐다.

“저들은 나를 특수 감시 상태 속에 집어넣고 접견, 통신, 독서, 운동, 세면 일체를 금지한 위에 심지어 6개월 이상 일체의 물품 구매를 금지시켰다. 하루 밥 세 끼밖에는 주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휴지 구매마저도 금지했다. 밥을 먹으면 배설을 해야 되고 배설을 하려면 휴지가 필요한데 손가락으로 닦으라는 얘기인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나는 나’이다. 나는 이 나라가 허리가 동강나고 가난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더욱더 사랑한다. 이곳밖에는 살 데가 없다. 내가 쓰는 시도 모국어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예술 장르이다… 이 사회에는 양도론(兩刀論), 결정론, 흑백 논리만이 지배한다. 죽일 놈 아니면 살릴 놈이고, 빨갱이 아니면 파랭이(靑)이다. 이러한 양도론이 우리 생활 전체와 가치 체계와 우리의 정신 내부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고통의 장본인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우리 사회의 분열을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울림이 크다. 다시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사이에 압박과 착취와 상호 불신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리이며, 또한 분열이다. 독재 권력과 국민 전체 사이에 화기어린 친교와 협동적 공동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독재 투쟁이 불가피하다. 현 정권의 제거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감옥에 던져질 것이다. 통일로 가는 길은 일차적으로는 그러므로 (내가) 서대문감옥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감옥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안다. 영생과 부활에 대한 다소곳한 소망만이 나를 구원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무죄가 아닌 어떤 형벌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이 길을, 내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 불행한 민족 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다시는 샛별 같은 이 나라의 청년들이 이 더러운 분단의 비극 때문에 법정에 끌려와 청춘을 시들게 하는 일이 없도록 끝없이 기원하겠다.”

법정 안 사람들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최후진술의 압권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내일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에게 모두 축복이 내리고 나를 박해하고 나를 미워하는 현 정부 최고 지도자 박정희 선생과 중앙정보부의 모든 고급 요원들의 가슴과 머리 위에도 흰 눈처럼 은총이 폭폭 쏟아지기를 빈다. 자비로운 은총이. 그래도 용서하시고, 모두 다 축복 받기를 빌겠다.”

재판부는 1976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김지하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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