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삶에 날아든 詩, 희망을 속삭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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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노숙인 자활 돕는 서울 ‘민들레 문학특강’ 현장 가보니

2일 서울 서대문구 합동에 있는 서울시립 구세군 브릿지센터에서 열린 ‘민들레 문학특강’에 노숙인들이 참석해 강의를 듣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일 서울 서대문구 합동에 있는 서울시립 구세군 브릿지센터에서 열린 ‘민들레 문학특강’에 노숙인들이 참석해 강의를 듣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배식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서로의 꼬리를 잡고 길게 늘어선다. 아직은 장마철 빗줄기는 부슬부슬 희끗한 검은 머리 위로 내리고 내일은 이곳에 없을 거야 위안을 하며 고가 밑 건물을 떠나 빗속으로 사라져간다.” 》

서울 서대문구 합동에 있는 서울시립 구세군 브릿지센터. 인근 서울역과 중구 일대 노숙인의 쉼터인 이곳 3층 회의실에서 시인 조정인 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 낭독을 끝내자 귀 기울여 듣던 노숙인 10여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든다.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시적 화자의 내면의 목소리가 잘 나타난 작품이네요. 이수한(가명) 선생님이 쓴 ‘중구의 새벽’이라는 시인데요, 이 선생님 오늘 나오셨나요?” 잠깐의 침묵 뒤에 누군가 답한다. “이 씨 오늘 못 나왔어요, 심장이 안 좋아져서 입원했어요.”

이곳은 문인들이 강사로 나서 노숙인들에게 문학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는 ‘민들레 문학특강’ 현장. 건물 옆을 수시로 지나는 기차의 소음도, 옆 사람의 체온이 밉게 느껴지는 한낮의 무더위도 문학을 향한 열기를 꺾지 못했다.

한 끼 챙겨 먹고 하룻밤 몸 누일 공간을 찾기에도 급급한 이들을 이 특강으로 이끈 것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거리에서 생활하다 보면 말로든 글로든 마음속 생각을 표현할 기회가 없어져요. 이 수업을 들으며 어설프지만 시를 끄적이면 제 마음속 소리를 들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죠.” 수강생 반장을 맡은 노숙인 한상건(가명·52) 씨의 말이다.

‘민들레 문학특강’에서 노숙인 수강생이 공책에 습작을 하는 모습.
‘민들레 문학특강’에서 노숙인 수강생이 공책에 습작을 하는 모습.
수강생이 노숙인이라고 해서 작품의 수준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조 시인은 “노숙인 중에도 대학을 나왔거나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분이 많다”며 “특별한 기교를 가르치기보다 이들이 자기의 진솔한 얘기를 토해낼 수 있게 돕는 게 강사의 몫”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강사로 참여했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은 옷차림에서 오는 거리감을 줄이려고 노숙인과 똑같은 러닝셔츠 바람으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진정성이 느껴졌던 걸까? 특강이 후반부로 갈수록 수강생들이 써낸 습작에서도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헐거워졌다. 감추고 싶을 것 같은 쪽방촌이나 고시원 생활을 유머로 버무린 작품도 있었다.

“밤 쓰러지듯 누우면 발바닥이 벽에 붙어서/나는 지금 서서 자는 건가…귓가를 스쳐가는 바퀴벌레마저 친구가 돼 버리는 공간/오늘 밤도 유일하게 반겨주는 모기 친구들에게/일용할 양식을 헌혈하면서 오늘 하루도 마감한다.”

지난해 서울 시내 노숙인 시설 20곳에서 시설별로 4회씩 진행했던 문학특강을 올해는 시설별로 10회씩 늘린 것도 이런 효과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특강 참여자가 써낸 시와 수필 우수작은 올해로 2회를 맞는 민들레 예술문학상에 응모한다. 수상자에게는 임대주택 입주권과 임대보증금(50만 원)을 부상으로 지급한다. 문학특강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노숙인이면 e메일(mhs6512@seoul.go.kr)이나 우편을 통해 서울시 자활지원과로 응모할 수 있다.

노숙인 260여 명이 응모한 지난해 1회 문학상 수상자 10명에게 임대주택 입주권을 제공했던 문화예술위원회와 서울시는 올해부터 그 대상을 30명으로 늘렸다. 또 시상금을 여러 사람이 자금을 모으는 클라우드펀딩 방식으로 개방해 모금한다. 문화예술위의 ‘예술나무’ 포털사이트(www.artistree.or.kr)를 통해 1인당 3000원 이상 기부할 수 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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