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디지털 새장 밖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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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꺼! 전자毒 빼자” 美 디지털 디톡스 캠프 체험기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7월 26일 오후 6시경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청사 맞은편. 경찰과 행인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이곳 미션 스트리트에 200m가 넘는 긴 줄이 섰다. 20대는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다소 쌀쌀한 날씨에 옹기종기 붙어 입장을 기다렸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되는 이날 행사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 도심 여름캠프. ‘독을 뺀다’는 뜻의 디톡스가 미용과 건강을 넘어 디지털 세상까지 확산되고 있는 현장이다.

캠프 입구에는 ‘여러분은 이제 디지털 기기가 없는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팻말이 보였다. 행사를 기획한 비영리 법인인 ‘디지털 디톡스(www.thedigitaldetox.org)’는 공지를 통해 하룻밤 동안 이어질 연락 두절에 대해 가족, 직장 동료, 지인들에게 미리 알려 놓을 것을 당부했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등 디지털 기기의 반입이 일절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는 유비쿼터스와 인연을 끊는 순간이었다. 3층 건물과 야외 마당이 있는 커뮤니티센터인 ‘프리스페이스’의 수용 공간을 고려해 주최 측은 500명 정도로 신청을 제한했지만 소용없었다. 15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 신청을 해 결국 먼저 오는 순서대로 입장시키기로 했다. 절반 가까이가 되돌아가야 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닉네임을 정하도록 되어 있다. 실명 나이 직함을 밝히지 않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 자칫 캠프가 다른 모임처럼 비즈니스 인맥을 쌓는 장소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오직 닉네임으로만 서로에게 불릴 뿐이다.
▼ 폰-디카 맡기고 본명-직함 비공개… '참나'만 입장 ▼

다음은 디지털 기기를 맡기는 장소. 업무상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기가 쉽지 않은 기자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맡기라고 하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취재차 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예외 인정을 요구했지만 답은 ‘노(No)’였다. 실랑이 끝에 겨우 디지털카메라만은 허용됐다. 디지털과 온라인 세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캠프를 찾은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관문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움과 망설임 증세가 나타났다.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주부 로라 릴리스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휴대전화와 아이패드를 맡기고 들어가기가 겁난다. 아이들과도 항상 연락해야 하고 이것으로 무언가 계속 사람들과 끈을 맺고 있다는 안도감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기를 맡기길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행사 진행요원들은 미소를 지으며 벽에 걸린 문구를 가리켰다.

‘다시 이어지기 위해 단절한다(Disconnect to reconnect).’ 트위터로 누군가를 팔로하고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며 이어져 왔던 인간관계를 잠시 멈추는 대신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세계, 그것이 슬로건이었다. 수긍한 듯 하나둘씩 디지털 기기를 내려놓았다. 모두 600여 명이 들어가는 데 2시간이 족히 걸렸다.

“잠시라도 멀어질 수 있다면”

닉네임 ‘탱고’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1층에 만들어진 텐트 안에서 느긋이 기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실명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규칙이 아니다”라며 웃으며 사양했다. 명함을 건네는 것도 “여기서만은 그러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 다만 ‘30대로 컨설팅 회사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는 정도만 공개했다.

‘디지털의 메카’로 불리는 실리콘밸리에서 자란 그는 한순간도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접속돼 있지 않으면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디지털 폐인이었다. 연신 울려대는 스마트폰, e메일을 한시라도 체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중압감, 습관적으로 들어가 보는 페이스북에 지쳐 가는 자신을 봤다. 그는 “매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즈니스 관계에서 잠시 떠나고 싶어서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디톡스 캠프에서 학교 시절 추억,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 가정의 일상사 등을 화제 삼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옆에 있던 한 중년 여성이 “이건 디지털카메라인데…”라며 장난스레 손으로 렌즈를 가렸다. 이날 이런 기기를 소유한 사람은 기자가 유일한 듯했다. 일부는 농담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심각하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추궁해 댔다.

텐트 옆 탁자에는 타자기가 여러 대 놓여 있었다. 크리스티안 씨(닉네임 펠리컨 브리프)는 느릿느릿 자판을 눌러 대면서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 흥미로워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일하는 ‘디지털 헤비 유저(Digital Heavy User)’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만 타자기 자판의 아날로그적 느낌이 낯설면서도 새롭다”고 말했다. 이어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없이 몇 시간 동안 지내본 적이 없는데 오늘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옆에서는 한 연인이 타자기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번갈아 가며 써내려 가고 있었다. 뒤에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시간을 잊은 것처럼 다른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3개 층에 걸쳐 마련된 실내 캠프에는 곳곳에 미끄럼, 보드 게임, 매듭 매기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의 캠프를 연상시켰다. 참가자들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했다. 그러나 일부는 혼자 동떨어져 이런 분위기를 어색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번이 두 번째 참가라고 밝힌 트래비스 시글러 씨(닉네임 토플리스)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며 처음 캠프를 찾았을 때의 경험담을 얘기했다.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처음에는 상대편 눈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웠어요.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연히 눈은 아래로 내려갔지만 불행히도 손 안에 스마트폰이 없으니까 불안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눈을 맞추고 생각을 나눠 가면서 디지털 후유증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성인들의 모임이지만 이곳에선 알코올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갖가지 향의 차들과 유기농 음식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속에서 일부는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요가에 몰두하기도 했다. 포토부스 앞에도 긴 줄이 생겼다. 디지털 디톡스에 나서는 자신들의 이유를 담은 팻말을 들고 즉석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 공간이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눈에 휴식을 주기 위해’ ‘하이킹하려고’ ‘경청하기 위해’ ‘섞이기(Mix) 위해’ ‘진짜로 수다를 떨기 위해’…. 갖가지 팻말을 들고 그들은 잠시나마 디지털 세상과 멀어지길 바랐다.

몇 시간의 놀라운 체험

이번 여름 캠프 참가자들은 디지털 기기를 맡긴 뒤 모닥불 옆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타자기를 두드리며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되살렸다. 리부트·디지털 디톡스 제공
이번 여름 캠프 참가자들은 디지털 기기를 맡긴 뒤 모닥불 옆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타자기를 두드리며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되살렸다. 리부트·디지털 디톡스 제공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야외 마당으로 나갔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이곳에선 모닥불이 곳곳에서 피워지고 있었다. 영어교사로 일하는 30대 초반의 여성 엘런 헤드릭 씨(닉네임 가브로슈·영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소년 혁명가 이름). 그녀는 이 모닥불 앞에서 6월 14일부터 3박 4일 동안 야외 캠프에서 타올랐던 모닥불을 떠올렸다.
▼ 보드게임-모닥불… 어, 모르는 사람들이 확 다가온다 ▼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북쪽으로 두 시간 반가량 걸리는 너바로의 캠프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행복함을 느꼈다고 했다. 집에 휴대전화를 두면서 ‘96시간 동안 별일이 없을까’라는 걱정이 컸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에 ‘굿바이 인사’를 한 250여 명의 참가자들은 당시 우스꽝스럽고도 멍청해 보일 정도로 자신을 열어놓았다.

“오늘 캠프처럼 어떤 디지털 기기도 갖고 들어갈 수 없었을뿐더러 당시엔 시계도 갖고 갈 수 없었어요. 시간이 사라진 공간에서 적응이 쉬웠다면 거짓말이겠죠. 집으로 돌아올 때 난 스마트폰이 아니라 해와 별과 달을 보면서 세상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어요.”

헤드릭 씨는 그날 경험으로 이날 캠프의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비슷한 이유로 봉사에 나선 사람만 30여 명에 달했다.

모닥불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많은 꽃이 놓여 있었다. 참석자들은 서로 머리에 꽃을 꽂아 띠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스콧 매켄지가 부른 유명곡 ‘샌프란시스코’의 가사처럼…. 196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존 체제와 문화에 반발해 일어나 미 전역으로 퍼졌던 ‘히피 문화’가 문득 겹쳐졌다. 당시 반전운동과 맞물려 기존 사회통념과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으로의 복귀를 강조했던 히피 문화의 21세기판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디지털 문화를 거역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일까.

새벽이 다가오면서 참가자들은 캠프를 하나둘 떠났다. 캠프를 나서던 데이비드 그린 씨(커뮤니티센터 프로그램 매니저)는 “나는 ‘디지털 중독’을 넘어 스마트폰은 나의 외부 두뇌이고 스스로 사이보그처럼 느꼈다. 몇 시간 동안이라도 이를 떨쳐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놀라웠다. 오늘 사람들과 모두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서 행복한 에너지를 채우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미국에 번져가는 디톡스 운동

‘디지털 기기 안 쓰는 날’에 참가한 이유를 적은 팻말을 들고 있는 3월 참가자들. 7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린 디지털 디톡스 여름 캠프에서도 같은 이벤트가 열렸다.
‘디지털 기기 안 쓰는 날’에 참가한 이유를 적은 팻말을 들고 있는 3월 참가자들. 7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린 디지털 디톡스 여름 캠프에서도 같은 이벤트가 열렸다.
미국에 일고 있는 ‘디톡스 운동’은 이 단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뉴욕 맨해튼에 헤드쿼터를 둔 비영리 시민단체인 리부트(Reboot·다시 부팅하기)도 2010년부터 매년 하루를 정해 24시간 동안 ‘디지털 기기 안 쓰는 날(NDU·National Day of Unplugging)’ 행사를 벌이고 있다. 기네스북의 아성에 도전하는 기업인 ‘레코드 세터’의 최고경영자(CEO) 댄 롤먼 씨와 MTV네트워크의 그레그 클레이먼 수석 부사장 등 미디어 업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힘을 모아 이 단체를 만들었다. 유타 주의 한 산에 오른 롤먼 씨는 금요일 밤 일몰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순간을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생각에서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온라인에서 떠나 있었던 그 감동을 함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올 3월 1일 열린 NDU 행사(nationaldayofunplugging.com)에는 50개 주와 111개국에서 모두 2만8000여 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이들이 지인을 통해 행사 내용을 알린 사람은 전 세계 1850만 명에 이른다. 이곳은 유대인 시민단체인 ‘안식일 성명(Sabbath Manifesto)’과도 공동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주일에 하루는 모든 일상에서 떠나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의 운동을 펼쳐 온 ‘안식일 성명’은 그 하루를 ‘디지털 없는 세상’으로 정해 리부트와 함께 ‘NDU 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들 단체는 앞으로 디지털에서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사례를 모아 전파하겠다는 계획이다.

디지털 기술에 중독된 10, 20대의 젊은이를 위한 여름 캠프도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리스타트(www.netaddictionrecovery.com)는 중독에 빠진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이끌고 45일간 진행되는 캠프를 떠난다. 워싱턴 주 폴시티에서 이런 캠프를 차린 전직 심리치료사 힐러리 캐시 씨(60)는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그들의 부모를 위한 일이다. 캠프에 들어오는 젊은이들의 부모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온라인에서 허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통계들도 현대인이 디지털에 과도하게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온라인스쿨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미국인들이 온라인에 파묻혀 있는 시간이 5년 전에 비해 117% 증가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훨씬 심각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2009년 기준으로 미국인들이 평균 주당 32.7시간(하루 약 5시간)을 온라인에 빠져 지낸다는 통계다. 영국 BBC는 올 1월 “디지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클리닉과 캠프 등이 올해 새로운 산업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미국 호텔과 리조트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쓰지 않으면 숙박료 등을 할인해 주는 ‘디지털 티톡스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에필로그

뉴욕의 집으로 돌아와 기자도 작은 변화에 도전했다. 잠자는 머리맡에 항상 두었던 스마트폰을 치우고 집 전화기와 알람시계를 갖다 놓았다. 연락은 집 전화로 받고 깨는 시간은 알람시계에 맡기기로 했다. 스마트폰은 회사의 연락을 받기 위해, 또 알람기능 때문에 침대 옆에 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딴판이었다. 잠자기 전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 포털사이트를 한 번씩 둘러보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고, 시간이 길어지면 가끔은 불면의 새벽을 보내곤 했다. 물론 나와 연결된 다른 사람들은 꿈쩍도 않는데 나 혼자만의 변화로 디지털의 구속력을 떨쳐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가족들과 마주하는 식탁에 스마트폰을 올려놓는 습관 같은 건 버릴 자신이 생겼다.

샌프란시스코=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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