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포천서 의문의 추락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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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2>민주구국선언

1976년 5월 4일 ‘3·1구국민주선언’ 사건 1회 공판정인 대법정 밖 연좌시위 모습.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입술의 십자 표시는 민주주의의 고난과 언론의 자유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동아일보DB
1976년 5월 4일 ‘3·1구국민주선언’ 사건 1회 공판정인 대법정 밖 연좌시위 모습.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입술의 십자 표시는 민주주의의 고난과 언론의 자유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동아일보DB
김지하 옥중 양심선언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75년 8월 17일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니 장준하 선생의 추락사였다. 그는 재야를 중심으로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해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지병인 협심증과 간경화 악화로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상태였다.

출옥 후에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정권과 맞섰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악회원 40여 명과 함께 경기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에 올랐다가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최후는 의문투성이였다.

그는 황폐하고 절망적이던 지적 풍토에서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들의 영혼과 정신을 울렸던 지성의 보루였으며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족통일운동, 반유신 반독재 투쟁을 이끌던 ‘재야의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천적’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통령에게 모욕감을 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1966년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박 대통령을 ‘밀수왕초’라 불렀고 1967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을 주도했다며 박 대통령을 ‘매혈자’라고 비난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 옥살이를 한다.

일제 때 반일민족주의를 표방한 그의 사상적 경향은 반공 반북을 견지한 자유민주주의였다. 독재에는 반대했지만 대북한 문제, 민족통일 문제에서는 적어도 이승만 노선이나 박정희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박 정권을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자 “모든 통일은 선(善)”이라는 환영 성명을 내기도 했다.

생전에 청빈한 생활로 가족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상중(喪中)에 대접할 쌀이 없어 문상객들이 각자 먹을 쌀을 가져갔다는 일화도 있고 셋집을 전전해 가족들이 장 선생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겨우 전셋집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인에게는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인 1991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13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는 그의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장 선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재야의 구심점이 느닷없이 사라졌지만 반독재, 반유신헌법 투쟁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976년으로 접어들면서는 전직 대통령과 정치권, 재야 명망가들이 총망라되는 ‘3·1민주구국선언’이 나온다. 국민들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기념일인 3·1절에 맞춰 시국선언을 내야 한다는 여론은 여러 갈래에서 일었다. 한 갈래는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와 정일형 의원 등 정치권이었고 다른 한 갈래는 개신교 쪽이었다. 이들은 윤보선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통합이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성명서 발표 현장이던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내와 기도회에 참석했다. 미사가 끝나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다.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족의 지도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랬기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높이 찬양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도 이 시점에서 물러선다면 한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신도들 낯이 변했다.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이어서 키 작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이우정 교수였다. 그는 차분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우리가 준비한 성명서를 읽었다. 선언문이 낭독되는 동안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도회는 조용히 끝났지만 이튿날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이어 3월 10일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이 ‘3·1구국선언’을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관련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서 검사장은 “일부 재야인사들이 반정부 분자를 규합해 계열별로 민주회복국민회의 또는 갈릴리교회 등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종교 행사를 빙자해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 퇴진 요구 등 불법적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엣가시로 여겨온 사람들을 한꺼번에 옭아매겠다는 의도가 뻔한 것이었다. 선언문 서명자는 10명이었는데 기소된 사람은 18명이나 되었고 3월 1일 행사뿐 아니라 1월 23일 원주 원동성당 신구 교회 연합기도회와 원주선언 사건 관련자들까지 함께 연루시켰기 때문이었다.

‘3·1구국선언’은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세상이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과 제1야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 현역 정치인, 재야 원로와 교수, 신구 교회의 중심인물이 총망라되어 반유신 선언을 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3월 19일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국의 인권 문제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고 라이샤워, 코언 교수 등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미국 정계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인권탄압 정책에 반대하라”고 촉구했다. 또 미 하원의원 102명과 상원의원 17명은 박 대통령에게 “이런 상태에서는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서한을 보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3월 8일 새벽에 끌려갔다. 자서전 중 한 대목이다.

‘나는 곧바로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푸른색 수의를 입고 독방에 갇혔다. 감옥 안은 무척 추웠다. (교통사고 후유증인) 고관절 변형으로 바닥에 앉아 있기가 무척 불편했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너무 아파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럴 때면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러면 정말 통증이 멎는 것 같았다. 무릎을 굽힐 수 없으니 식사할 때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최소한의 의자와 식탁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1년 9개월가량의 옥고를 마치고 1977년 12월 18일 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김 전 대통령의 연금 생활은 1년 뒤인 1978년 12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9대 대통령 취임을 기해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면서 2년 10개월 만에 풀린다.

올 7월 3일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판사 이규진)는 ‘민주구국선언’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혐의에 대해 36년 만에 무죄 판결했다. 김 전 대통령뿐 아니라 선언에 참여했던 고 문익환 목사, 고 윤보선 전 대통령, 고 정일형 전 의원, 고 함석헌 선생 등 16명이 모두 뒤늦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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