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현우]정당공천 폐지는 문제의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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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객원논설위원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정치경영학과 교수
이현우 객원논설위원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정치경영학과 교수
박사 공부 초기 시절에 선배 한 분이 술자리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사전공자로서 역사의 의미를 찾으려 수년간 연구한 결과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흐름의 주기를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두루마리 휴지에 역사적 사실을 일일이 표기하고, 그 휴지를 건물 옥상에서 밑으로 던져 펼쳐 놓고 운동장 저 끝에서 조망하면 역사의 반복성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당시 진지한 표정에 압도되어 그분의 학문적 태도와 성과에 존경을 표했다. 그 후 매년 신입생이 오면 그 선배는 똑같은 말로 후배들을 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역사에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다름없다. 그런데 오래된 역사가 아니라 최근의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발생했다. 바로 기초선거에서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다.

지난달 민주당이 권리당원 투표를 통해 기초선거에서 정당공천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불행하게도 당원들이 정당의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다. 공천 폐지는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의 공약이었으며, 이미 새누리당에서는 올 4월 재·보궐 기초선거에서 무공천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내년 지방선거에서 기초선거에 대한 정당공천은 폐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천 폐지를 두고 언론에서는 안철수 신당을 견제하기 위한 여야의 전략이라는 음모론과 현역 의원들이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편 여성단체는 비례대표 구성에 여성 후보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정당공천 폐지라는 선거제도의 변화가 유권자의 투표 선택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이 가장 중요한데도 말이다.

정당공천 폐지는 고열(高熱)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얼음찜질에만 매달리는 대증요법과 다르지 않다. 정당공천 없는 기초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2006년 기초의회의원 선거에서 정당공천이 있었고 한 정당이 후보자를 복수 공천하는 경우 ‘가’, ‘나’ 등의 기호를 사용했다. 따라서 같은 정당의 후보자들은 후보자의 성명 순에 따라 ‘1-가’, ‘1-나’, ‘1-다’ 등으로 표시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 기호를 부여받은 후보의 당선율은 78.3%로 ‘나’, ‘다’ 등 기타 모든 기호의 후보 당선율 45.7%보다 훨씬 높았다. 기호 순서가 당락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정당별로 당선율은 다르지만 모든 정당에서도 ‘가’ 기호의 당선율은 다른 기호 후보보다 훨씬 높았다.

이 결과는 상당수의 투표자들이 정당은 선택했지만 같은 정당의 복수 후보자 중에서는 구별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정보가 결여된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음성으로 제시되는 선택에서는 맨 마지막의 것이 가장 기억하기 쉬운 대안으로서 최신 효과가 기대되지만, 투표용지와 같이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선택에서는 첫 번째 기재된 대안이 가장 눈에 띄기 때문에 초두(初頭) 효과에 의한 것이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는 기초의회의원 후보에 대한 정당공천이 없었다. 정당공천이 없기 때문에 기초의회 후보들은 정당번호 대신에 ‘가’, ‘나,’ ‘다’ 등으로 차별화했다. 그러나 지역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부산에서는 기초의회의원 후보 중 ‘가’ 후보의 당선율이 66%인 데 비해 ‘나’ 기호 후보는 29%, 반대로 광주에서는 ‘가’ 기호 후보가 35%, ‘나’ 기호 후보가 59%의 당선율을 보였다. 투표자들이 후보 기호가 정당과는 전혀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순서에 따라 지역주의 투표처럼 ‘가’, ‘나’에 편중성을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후보자를 선택할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유권자들이 후보자 정보를 충분히 갖도록 의식 변화가 생기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주장은 규범적 대안일 뿐 전혀 실행 가능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정당공천이 폐지돼도 결코 유권자들은 후보자 정보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보다 더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후보자들을 평가할 때 기본적으로 공천한 정당을 고려한다. 도시화할수록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소단위 선거에는 관심이 적게 마련이다. 따라서 기초선거 투표 선택에서 후보를 공천한 정당에 대한 호감도가 다른 단위의 선거에서보다 더 중요하다.

정당공천을 폐지한다면 유권자들은 무엇을 보고 투표선택을 해야 할까. 정당공천 폐지가 누구에게 유리한가만 따지지 말고 선거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가를 먼저 걱정해야 한다. 생생한 경험의 교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된장인지를 찍어 먹어봐야 하는가. 공천 과정에 비리가 있다면 그것은 정당 내부의 문제이고 불법 행위는 엄격하게 처벌하면 된다. 정당 문제를 해결하고자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의 의미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이현우 객원논설위원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정치경영학과 교수 quick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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