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무예 이야기]조선의 화약무기와 국방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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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화약기술 주변국 최고 수준
中-日사신들 불꽃놀이 화염에 놀라

1795년 제작된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가운데 불꽃놀이 장면.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의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한 후 불꽃놀이를 즐기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의 중앙에 붉은 화염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땅속에 화약을 묻어 터뜨리는 매화법(埋火法)을 묘사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95년 제작된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가운데 불꽃놀이 장면.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의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한 후 불꽃놀이를 즐기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의 중앙에 붉은 화염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땅속에 화약을 묻어 터뜨리는 매화법(埋火法)을 묘사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고려 시대 최무선에 의해 ‘국산화’가 이뤄진 화약무기는 조선이란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국방력 강화가 절실했던 신생국가에 화약이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기였다. 조선 시대에는 천자(天字), 지자(地字) 총통 등의 대구경 화포를 비롯해서 오늘날로 따지면 권총과 비슷한 휴대용 화약무기인 세총통(細銃筒)까지 개발됐다. 조선 전기까지 우리나라는 당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약무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화약무기의 발전은 화약의 또 다른 용도인 ‘불꽃놀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화려한 불꽃놀이는 보기에도 좋지만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중요성이 있었다. 유사시에는 불꽃놀이 기술을 바로 군사용도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불꽃놀이는 조선 국방기술의 우위를 알리는 외교적인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
   

국력을 과시한 조선의 불꽃놀이

정종 1년(1399년), 한양에 도착한 일본 사신 앞에서 당시 화약무기를 담당하던 군기감(軍器監)이 초대형 불꽃놀이를 펼쳤다.

일본 사신은 그 모습을 보고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신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불꽃놀이를 통해 그들의 기를 죽인 것이다.

조선 개국 초부터 지속적으로 북방 국경지역을 약탈해온 여진족 사신 앞에는 특별히 불꽃놀이용 화산붕(火山棚)을 집중적으로 설치했다. 불꽃이 별똥별처럼 하늘을 가르고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고 전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고려시대 이전부터 고도의 화약무기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중국인들은 자국의 불꽃놀이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조선에 온 중국 사신들은 조선의 불꽃놀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빈정댈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작심하고 보여준 불꽃놀이의 화염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 화염이 수십 m 높이로 치솟고 폭음이 궁궐 전체를 압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 사신은 “그 넓은 중국 어디를 가도 이런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의 불꽃놀이 기술의 우월함이 주변국들로 알려지자 각종 첩보활동이 조선의 화약기술에 집중될 정도였다.

당시 화약기술은 일급 국가기밀이었기 때문에 만일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함부로 누설하거나 화약무기를 국외로 빼돌린 자는 극형에 처했다.

심지어는 국왕과 대신들이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중국의 사신이 올 때는 절대로 불꽃놀이를 보여주지 말자’는 의견이 자주 등장했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불꽃놀이 즐겼던 성종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는 어김없이 궁궐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특히 성종(成宗)은 그 화려한 모습에 반해 군사용 비축 화약까지 모두 모아 불꽃놀이에 사용하기도 했다.

성종 8년(1477년)에는 불꽃놀이용 화약을 제조하던 제약청(製藥廳)에서 불이 나 강력한 폭발로 인해 4명이 즉사하고 2명이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며칠 후에 불꽃놀이를 준비하라는 어명을 내렸을 정도로 불꽃놀이에 빠져 있었다.

당시 성종은 “불꽃놀이는 군사업무에 해당하는 일이니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특히 화약의 폭발소리로 귀신을 쫓을 수도 있으니 재앙을 물리칠 수 있는 중대한 일이다”라고 강행의 이유를 밝혔다.

조선 후기에도 불꽃놀이는 최고 연희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때는 이미 불꽃놀이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수십 개의 화약통이 연속적으로 터지는 장관을 연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기록을 보면, 화약통을 묶은 장대를 밧줄로 수십 개씩 연결해 마치 긴 다리처럼 만든 후 화약통이 연속으로 폭발하게 하는 ‘다연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성산화(星散火)라는 불꽃놀이는 높은 하늘에 불꽃이 화려한 수를 놓는 것으로 현대의 축제와 엇비슷한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 성산화는 군사신호용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 지속적인 개발이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의 화약기술은 금비책, 다시 말해 특급보안을 이유로 활발하게 보급되지 못했다.

역사에 ‘만약에’라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지만, 조선의 불꽃놀이 기술과 군사과학능력이 지속적으로 발달했다면 조선 500년 역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여기저기 축제의 현장에서 불꽃놀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불꽃놀이에서 자주국방의 길을 찾았다.

요즘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조선군은 제대로 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허둥대는 오합지졸로 묘사되곤 한다. 이것은 상당 부분 실제 역사와 다르다. 세계적으로 500년이란 역사를 이어나간 나라는 흔하지 않다. 국방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은 결코 나약하기만 한 나라가 아니었다.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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